곰인형의 행복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11
가브리엘 벵상 글.그림 / 보림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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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쁘게 놀며 자라나는 즐거움과 그림책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4] 가브리엘 벵상, 《곰인형의 행복》(보림,1996)



 보금자리를 옮기느라 한 달 남짓 집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조촐히 지내기 퍽 힘들었습니다. 애써 한 자리에서 지내며 밥을 함께 먹더라도 미처 못 옮긴 짐에 아직 치우지 못한 짐이 한가득이요, 옆지기 어버이 살아가는 집에서 여러 날 머물 적에도 아이들 놀잇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달 하고 스무 날 만에 드디어 아이들 놀잇감을 이삿짐 나르는 짐차에 싣고 전남 고흥군 시골집으로 들어옵니다. 네 살 딸아이는 한 달 스무 날 만에 피아노를 만지고 놉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이 놀잇감 가운데 인형을 곱게 담은 상자꾸러미를 맨 먼저 끌릅니다. 상자꾸러미를 끌러 아이를 불러 보여주지는 않고, 아이가 오가는 길목 잘 보이는 자리에 상자꾸러미를 열어 놓기만 합니다. 삼십 분쯤 뒤, 아이는 인형 상자를 이내 알아채고는 하나하나 꺼내어 “예쁘다” 하고 말하면서 잠자리맡에 한 줄로 나란히 앉힙니다.


.. “아니, 여기 또 있네! 이런 개울에서 무얼 하고 있어? 길을 잃어버렸니? 누가 너를 버렸어? 자, 우리 집으로 가자. 내가 보살펴 줄게.” ..  (4쪽)


 첫째 아이가 갖고 노는 인형 가운데 어머니(랑 아버지)가 사 준 인형은 딱 둘입니다. 옆지기(아이 어머니)가 꼭 한 번 사고프다 하던 인형 두 가지만 우리가 사서 아이한테 선물했을 뿐, 다른 인형은 모두 다른 사람이 놀다가 물려주었거나, 헌 물건 파는 데에서 값싸게 얻었거나, 옆지기가 어릴 적 갖고 놀던 인형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새 인형은 없습니다. 아이 나이하고 비슷한 인형이 없어요. 네 살 딸아이가 갖고 노는 인형들 나이가 서른 살 즈음 되었다고 할까요. 딸아이가 앞으로 이 인형들을 예쁘게 갖고 놀면서 예쁘게 건사할 수 있다면 딸아이가 낳을 딸아이한테 곱게 물려주면서 ‘예순 살 먹은 인형’이 될 수 있으며, 딸아이가 낳을 딸아이 또한 예쁘게 갖고 놀며 곱게 물려준다면 ‘아흔 살 먹은 인형’까지 될 수 있어요.

 아이들 갖고 노는 놀잇감을 찬찬히 바라봅니다. 옆지기가 어릴 적 옆지기 어머님과 아버님이 선물한 놀잇감이 꽤 많습니다. 옆지기 어린 동생이 갓난쟁이일 무렵 갖고 놀던 놀잇감 또한 퍽 많습니다. 첫째 아이는 제 어머니랑 외삼촌이 갖고 놀던 놀잇감을 살그머니 물려받습니다.

 이 가운데 아버지가 어린 날 갖고 놀던 놀잇감은 얼마 없습니다. 아버지라고 놀잇감이 얼마 없지는 않을 텐데, 참말 아버지 놀잇감은 얼마 없어요. 그렇다고 아버지 놀잇감이 모두 쓰레기터 어딘가에 묻히거나 불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럭저럭 아버지 놀잇감도 제법 남았어요.

 다만, 아버지 놀잇감은 종이상자에 차곡차곡 담겨 짐꾸러미 어딘가에 틀어박힙니다. 아버지는 어릴 적 갖고 놀던 놀잇감을 꺼내지 않습니다. 옆지기가 이녁 놀잇감을 아이한테 물려주며 예쁘게 건사하도록 이끄는 맑은 빛을 모르던 아버지이기에, 아이가 조금 더 자랄 때에 ‘네 아버지하고 함께 살아오던 낡은 물건’이랍시고 보여주기만 하겠구나 싶어요.


.. “누가 좀 가르쳐 줘. 사람들은 왜 나를 쓸모없다고 할까? 내가 그렇게 낡았니?” “조용히 해! 조용히 해! 그건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야. 그만 조용히 해!” ..  (9쪽)


 내 어린 날을 돌이킵니다. 내 어린 날 우리 어머니는 형이랑 내가 갖고 놀던 놀잇감을 틈틈이 그러모아 말끔히 내다 버리셨습니다. 형이랑 내 놀잇감을 말끔히 내다 버리고 나면, 형이랑 내가 쓰던 작은 방이 무척 넓게 보이고 시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허전합니다. 텅 비고 쓸쓸합니다. 동생은 으레 쓰레기터에 들어가 쓰레기내음으로 온몸이 절면서 버려진 놀잇감을 찾습니다. 이렇게 찾아서 돌려놓아도 어머니는 다시 버리셨고, 또 찾고, 또 버려지고 …… 끝끝내 아주 버려진 놀잇감이 많고, 끝까지 되살린 놀잇감이 제법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어린 날을 보낸 나머지, 내 살아남은 놀잇감을 쉽사리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아이가 마음껏 갖고 놀도록 이끌지 못해요. 바보스러운 생각만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옆지기 어머님이나 아버님은 옆지기 어린 나날 놀잇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쪽에 잘 건사해 주셨습니다. 옆지기는 이런저런 놀잇감이 있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옆지기는 어릴 적에 이 놀잇감들로 신나게 놀았고, 이제 이 놀잇감들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아이들이 갖고 놀도록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손짓 몸짓이 무르익지 않았으니, 또 이것저것 궁금하기도 하니까, 혼자 섣불리 갖고 놀다가 부러뜨리거나 잃어버리곤 합니다. 이때에 옆지기는 딱히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혼자 곁에서 ‘아이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때때로 드물게 부러뜨리거나 잃어버리기는 해도, 늘 부러뜨리거나 잃어버리지는 않아요. 아니, 옆지기랑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옳게 사랑하지 못하는 날이나 참다이 살아내지 못하는 날에 이렇게 놀잇감을 망가뜨리거나 잃곤 합니다. 어버이부터 어버이답게 착하면서 슬기로울 때에는 아이들도 아이답게 착하면서 슬기롭습니다. 어버이부터 사랑스러우면서 해맑을 때에는 아이들도 아이답게 사랑스러우면서 해맑아요.


.. “콩콩아, 그만 울고 어서 자야지. 내일 보자, 안녕!” ..  (13쪽)


 두 아이 외삼촌인 옆지기 동생은 이듬해에 고등학생이 됩니다. 고작 세 해 앞서까지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아이들 외삼촌은 이녁이 어릴 때에 갖고 놀던 놀잇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기도 합니다. 아이들 외삼촌은 외삼촌대로 오늘 나이에 맞게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 즐깁니다. 우리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 나이에 맞게 저희 놀잇감을 즐기면서 한 살 두 살 새로 먹겠지요. 아버지인 나는 아이들 노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더 갖고 놀지 않는 놀잇감’이 보이면 넌지시 집어서 조용히 상자에 담겠지요. 아이들이 앞으로 나이를 더 먹고 나서 돌려줄 수 있게끔, 아이들이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이 되면 슬그머니 내밀며 ‘너희 어버이는 돈 버는 재주가 없어 돈을 물려주지 못한다만,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을 줄만 알아 이런 것만 겨우 물려준다.’ 하는 글월 하나 붙이겠지요.


.. “그래 그래, 이건 네 거야. 자, 어서 가져가. 하나 더 가지고 싶다고? 그래, 그것도 가지렴! 안녕.” ..  (35쪽)


 가브리엘 벵상 님이 일군 그림책 《곰인형의 행복》(보림,1996)을 아이와 함께 읽습니다. 나는 이 그림책을 두 아이가 아직 이 땅에 찾아오지 않고, 옆지기 또한 아직 모르던 때부터 혼자 즐거이 읽었습니다. 나하고 함께 살아갈 옆지기가 있을까 없을까 모르던 때부터 그저 혼자 즐겁게 읽었습니다. 내 숨결이 사랑이 되어 작은 씨앗으로 빚어지는 예쁜 아이들이 태어날는지 안 태어날는지 알 노릇이 없던 때부터 그예 홀로 신나게 읽었습니다.

 첫째 아이가 네 살이 된 때에 이 그림책을 새로 장만합니다. ‘아버지가 보던 책’은 따로 있는데, ‘딸아이가 볼 책’을 구태여 다시 장만합니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예전에 혼자 보던 그림책이 많습니다. 이 그림책마다 아이 손자국이며 연필 자국이며 가득 묻습니다. 두 번 다시 살 수 없는 옛날 그림책에까지 아이가 볼펜으로 죽죽 그림을 그려 아이고야 한 적이 있으나, 그래도 어쩌는 수 없이 고맙게 여기자고 느껴요. 애틋한 물건으로 치면 슬프지만, 살가운 물건으로 치면 새 살이 돋는 셈이거든요. 참말 앞으로 우리 딸아이가 저처럼 예쁜 딸아이를 낳아 돌보는 날을 맞이할 때까지 내가 살아갈 수 있으면, 나는 내 딸아이가 낳은 딸아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자 봐라, 여기 이 그림과 줄이 너희 어머니가 너희 할아버지 알뜰히 여긴 책에 남긴 선물이란다.” 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 어느 날은 ‘딸아이가 낳을 딸아이’가 할아버지한테 여쭙겠지요. “왜 이 그림책은 두 권이 있어요? 어, 이 그림책은 세 권이나 있네?” 하고. 그러면 할아버지가 될 나는 “너희 어머니가 신나게 보느라 다 낧거나 닳으면 너희가 볼 수 없으니, 앞으로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보여주고 싶어 부러 한두 권 더 장만해서 갖춘 책이란다.” 하고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어쩌면, 《곰인형의 행복》은 2040년까지 판이 안 끊어질 수 있고, 2040년 무렵 우리 딸아이가 딸아이를 낳을 때에도 새책방에서 찾아볼 수 있어, 새책으로 장만한다면, 오래오래 묵은 내 그림책과 내 딸아이 그림책에다가 ‘딸아이가 낳은 딸아이’ 그림책 세 가지가 한 자리에 놓이리라 생각합니다. (4344.11.10.나무.ㅎㄲㅅㄱ)


― 곰인형의 행복 (가브리엘 벵상 글·그림,보림 펴냄,1996.7.3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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