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머금는 책
오늘 드디어 우리 책을 모두 날라서 차곡차곡 쌓았다. 바닥에서 차오르는 물기 때문에 온통 곰팡이투성이가 되고 만 책꽂이에다가, 책장으로 차츰차츰 곰팡이 기운과 냄새가 배어드는 일을 도무지 지켜볼 수 없었는데, 곰팡이무덤에서 허덕이던 책들을 열넉 달 만에 곰팡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자리에 몽땅 옮겼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상자 씌운 짐차에 실린 책들은 기나긴 시간 달린 끝에 전라남도 고흥군 깊은 시골자락에 닿았고, 모두 다섯 시간에 걸쳐 다섯 사람이 바지런히 등짐으로 지고 나르며 책을 쌓았다.
마지막 짐차 삼천 권쯤 더 날라야 할 즈음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들었다. 이제 조금 더 하면 되는데 하늘이 기다려 주지 못하는구나 싶어 아쉬우면서, 이제껏 하늘이 오래도록 기다려 주었구나 싶어 고마웠다. 두 마음으로 책짐을 마저 나르면서 숫자를 센다. 앞으로 몇 차례 등짐을 더 지면 일을 마칠까?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고 다리가 풀려 해롱거리면서도 열다섯이라는 숫자를 센다. 그래, 마지막 삼천 권을 나르느라 열다섯 차례 등짐을 졌으면, 오늘 나는 백쉰 차례 남짓 등짐을 지었구나.
일을 거의 마칠 무렵,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티고 견디면서 등줄기와 목덜미와 뺨과 팔뚝과 어깨에 내리는 빗방울을 느끼다가는 이 빗방울이 책마다 어느 만큼 스며들는지 헤아린다. 이 가느다란 빗방울은 책들을 다치게 할까. 이 가느다란 빗방울은 먼지구덩이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리던 책들한테 따사로운 손길이 될까.
나는 내 살붙이들 모두한테 따사로운 손길을 내밀고 싶다. 나는 내 이웃과 동무 누구한테나 따스히 말길을 트고 싶다. 그런데, 이삿짐 나르는 일꾼한테 치를 일삯을 놓고 옆지기한테 그만 목소리를 높이고 만다. 이 사람들이 틀림없이 계약을 맺을 때에 ‘아주 싼 값’으로 해 주었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너무 싼 값에 계약을 맺었다고 여겼다. 그래, 옳게 약속했건 잘못 약속했건 약속한 사람이 잘못이야. 그렇지만, 약속한 사람이 어리석게 약속한 줄을 뻔히 알기 때문에, 나는 잘못된 값을 치를 수는 없어. 내 어리석은 몸짓을 노상 가다듬어 주는 옆지기이지만, 내 옆지기가 잘못 아는 대로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에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길을 내밀어 바른 길을 보여줄밖에 없어. 짐 나르는 일꾼들이 거짓말 아니라 참말 두 손 들 만큼 혀를 쑥 빼물며 죽으려 하는 모습을 느끼면서 이 사람들을 나무랄 수 없지. 이 사람들도 몸으로 느낄 테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을 안쓰러우면서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해.
믿는다. 믿으면서 산다. 책짐 함께 나른 일꾼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나한테 걱정어린 이야기를 들려주는 옆지기가 착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너무 고단하고 지친 나머지, 옆지기한테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한 내가 못난 사람이구나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삿짐 일꾼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아야지. (4344.11.8.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