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지음 / 일지사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책과 함께 걸어가는 내 길
 [책읽기 삶읽기 23] 김성재,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내 길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나는 이 길이 좋다고 느껴서 걸어가지 않습니다. 나는 이 길에서 책탑을 쌓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책삶으로 무언가를 이룰 뜻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어머니가 첫째 아이 넉 돌맞이 생일을 떠올려 주었습니다. 첫째는 음성 할머니한테서 생일돈을 받았습니다. 다만, 생일돈은 내 은행계좌로 넣어 주십니다. 이 생일돈으로 옆지기는 실꾸리를 장만합니다. 고맙습니다. 옆지기는 새로 장만하는 실꾸리로 아이 옷을 뜰 수 있고, 음성 할머니나 일산 할머니한테 드릴 옷가지를 뜰 수 있겠지요. 나는 이 생일돈으로 책을 삽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춘천으로 오는 길에 서울을 들러 올들어 처음으로 헌책방마실을 했고, 헌책방에서 아이가 즐겁게 읽을 그림책을 잔뜩 삽니다. 음성 할머니가 주신 생일돈을 옆지기하고 나는 알뜰히 다 써서 아이한테 선물을 마련한 셈입니다.

 서울마실을 하는 김에 세 군데 출판사를 들러 인사를 합니다. 새 보금자리로 옮기면 서울마실은 더 뜸할 테니까, 이렇게 온 김에 들러서 인사를 하지 못하면, 내 글을 찬찬히 엮어 책으로 펴낸 아름다운 땀방울이 고마웠다는 마음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하며 입으로 말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서로서로 고운 마음꽃이 피면서 책 하나가 어떤 사랑인가를 느끼리라 믿어요.


.. 양질의 책을 꽤 많이 낸다 하더라도 질이 낮은 책도 아울러 내고 있다면 그 출판사의 평가는 자연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좋은 책을 냈다 하더라도 그 공급 과정에서 품위를 잃어 책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다면 결고 높이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이다 … 수많은 편집자들이 새 맞춤법을 익히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른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도 새 맞춤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고 혼동하는 편집자들도 간혹 보인다 ..  (16, 100쪽)


 출판사에 들를 때면 그동안 새로 낸 책을 선물받기도 하고, 출판사 책꽂이에 꽂힌 여러 가지 책을 둘러보기도 합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며 만난 아름다운 책을 내 가방에서 꺼내어 보여주거나 빌려주기도 합니다. 두 번 다시 장만하기 어려울 만한 책을 빌려줄 때면 언제쯤 돌려받을까 궁금하지만, 거의 돌려받은 적이 없지만, 그러니까 출판사 일꾼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려 그만 사라지는 책이 되고 말지만, 이러하건 저러하건 내 손과 당신 손을 거친 책에 깃든 이야기와 느낌은 오래도록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선물받은 책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살며시 펼칩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내 눈을 거쳐 머리를 지나 가슴속으로 스밉니다. 착한 사람 착한 나날 착한 책이 나한테 스며듭니다. 종이에서 나는 책내음을 맡고, 종이에 깃든 이야기에서 피어나는 책내음을 맡습니다.


.. 구순이신 (정문기) 선생님은 우리 출판사에 들르시면 “참 우연히 만났지.” 하곤 하셨다. 한국의 위대한 노인들을 저자로 모신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  (45쪽)


 ‘일지사’라는 출판사를 일구는 김성재 님이 내놓은 책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일지사,1999)를 생각합니다. 일지사에서 내놓은 아름다운 책이 퍽 많은데, 이 가운데 《한국어도보》(1977,정문기 씀)는 아주 돋보입니다. 이러한 책을 펴낸 출판사가 놀랍고, 이러한 책을 생각하며 써낸 정문기 님도 놀랍습니다. 이러한 책을 내놓아 나눈 출판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아름다운 책이 태어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좋은 넋이 좋은 마음씨가 되어 좋은 책으로 깃들고, 좋은 책은 좋은 책씨로 거듭나서 수많은 사람들 좋은 넋을 새로 보살피면서 새로운 좋은 책이 태어나도록 이끕니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이 책으로 스며들고, 책 하나가 천천히 퍼지면서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웁니다.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라는 책은 아름다운 삶을 스미고픈 꿈으로 책밭을 일군 한 사람 땀방울을 담습니다. 책 하나를 천천히 퍼뜨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우려 했던 한 사람 눈물방울을 담습니다.

 책이라서 대단하거나 책이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이어야 하거나 책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이기에 책이 태어나고, 책이 태어나면서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을 적바림합니다.


.. 학술 출판사는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넓은 의미의 학술서인 해설서나 대학교재에 치중하거나, 다른 부문의 출판물에 의한 이익으로 충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벌어 놓은 돈을 까먹거나, 이잣돈으로 지탱하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 서적의 소매가격을 서점에서 자유로이 결정한다면 무분별한 가격할인의 추악한 싸움이 벌어져 유통 질서가 문란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서점과 출판사의 도산이 속출할 것이며, 자본력이 튼튼하거나 저질 출판물을 내는 출판사만 살아남을 것이다 … 높은 질의 저작물은 저술해 봤자 서점에 꽂히지도 않을 것이며, 출판을 맡아 줄 출판사도 없을 것이니, 저작자들의 저술 의욕이 상실될 것이다 ..  (72, 122∼123쪽)


 책과 함께 살아가는 내 하루를 돌이킵니다.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내 삶을 돌아봅니다. 책을 매만지면서 살붙이들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운 이웃 고운 삶을 어깨동무합니다. 책을 쓰면서 좋은 벗님 아프거나 슬픈 어깨를 다독이고 내 눈물을 씻으며 내 웃음을 터뜨립니다.

 값싸게 사들여서 좋은 책이란 없습니다. 헌책방은 책을 값싸게 사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도서관은 책을 거저로 빌려 읽는 데가 아닙니다. 내가 땀흘려 일하여 일군 돈을 세금으로 냈기에 도서관이 태어납니다. 수많은 책이 더 너른 곳에서 더 너른 새 임자를 만나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헌책방입니다.

 마땅한 값을 치르며 책을 사서 읽습니다. 책을 사서 읽기에 내 삶을 더 착하게 살찌우고 싶습니다. 옳게 값을 치르며 책을 장만하여 갖춥니다. 집에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과 함께 예쁘게 살아가며 우리 아이들이 예쁜 꿈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 좋은 학자들을 늘 대하게 되고, 한국학의 수준과 동향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  (270쪽)


 김성재 님은 참 기쁘게 글을 써서 당신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 하나를 내놓습니다. 자랑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떠벌이거나 손가락질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삶을 책으로 엮어 내놓듯, 좋아하는 책을 어떻게 아끼며 돌보았는가 하는 하루하루 이야기를 천천히 적바림해서 선물합니다.

 책마을은 사람마을이고, 사람마을은 이야기가 있는 터전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터전인 사람마을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날마다 새로운 손길로 내 살붙이를 어루만지며, 내 이웃하고 즐겁게 손을 잡습니다.

 길디긴 빗줄기가 살짝 그쳤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파랗디파란 하늘이 되면서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쬡니다. 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를 몰아 우리 식구들 새 보금자리가 어디에 어떻게 예쁘게 있는가를 살펴야겠습니다. 아버지는 춘천 멧자락을 돌아다닐 테고, 어머니는 음성 멧자락을 바라보며 둘째 기저귀를 신나게 널겠지요. 마음책이 삶책이 되고, 삶책이 사랑책으로 거듭납니다. (4344.8.18.나무.ㅎㄲㅅㄱ)


―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글,일지사 펴냄,1999.9.15./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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