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 텔레비전


 여관에서 잠을 깬다.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는다. 여관에서 묵어도 새벽에 잠이 깨기는 똑같다. 침대에서 뒹굴다가 텔레비전을 켜 본다. 운동경기를 보여주는 방송이 참 많다. 드문드문 영화가 나오고, 어떤 영화는 아래쪽에 ‘아이들이 보기에 알맞지 않은 시간대이니 아이들이 보지 않도록 잘 살펴 주십시오’ 비슷한 글월을 내보낸다. 열아홉 살 밑으로는 보지 말라는 빨갛다는 영화도 흐른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 오른쪽 윗자리에 ‘19’이라는 동그란 딱지가 안 붙는다. 그저 서슴없이 흐른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은 하나같이 죽은 얼굴이다. 이 죽은 얼굴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지능이 있는 벌레가 며칠 만에 군인 10만을 죽였다. 이 벌레들 때문에 지구별이 무너질 수 있다’는 줄거리를 보여주는 미국 영화가 흐른다. 어쩌면 이렇게 터무니없다 싶은 영화를 다 만들고 다 보여주는가 싶어 놀랍다. 게다가 이 ‘외계별 벌레 죽이기 영화’는 ‘벌레는 징그럽게 생겼으니 다 죽여야 해’ 같은 말을 거리끼지 않고 내뱉을 뿐 아니라, 벌레를 아주 모질게 고문을 하고 생체실험까지 한다. 게다가 벌레를 죽이거나 괴롭히면서 군인들이 낄낄대며 소리 높여 웃는다. 더욱이, ‘벌레를 잡는 거룩한 일’을 하도록 온 나라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군인이 됩시다’ 하고 외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패러디라는 영화인가? 아니면 참말 바보스러운 영화인가? 미국은 전쟁무기를 만들어 힘여린 나라를 짓밟아 지하자원을 빼앗을 뿐 아니라, 이렇게 전쟁영화를 끝없이 만들면서 사람들 마음에 ‘전쟁영웅’과 ‘전쟁놀이’ 마음을 심는 슬픈 짓을 언제까지 벌이려나.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 착하면서 따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송을 하나라도 찾아볼 수 있기를 빌지만, 단추를 꾹꾹 눌러 한 바퀴를 돌아도 모조리 ‘물건 사고팔기’와 ‘주식’과 ‘하느님 사랑’과 ‘대입시험 문제풀이’와 ‘연예인 뒷얘기 호박씨 까기’와 ‘운동경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러한 방송을 즐기니까 이러한 방송만 있는 셈인가. 사람들한테 이러한 방송을 보여주며 길들이려고 이러한 방송만 넘치는 노릇인가. 골이 아프다. 여관 침대에 조금 더 누워서 머리를 식혀야겠다. 가게에 들러 김밥을 산 다음, 전철을 타고 얼른 춘천으로 가서 우리 네 식구 조용히 살아갈 멧기슭 옆에 낀 조그마한 살림집을 찾아보아야겠다. (4344.8.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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