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숲 19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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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고운 만화책 하나란
 [만화책 즐겨읽기 38]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19)》



 글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볼 때뿐 아니라, 만화책을 볼 때에도 늘 느끼며 생각합니다. 말만 예쁘다 해서 예쁜 글책이 되지 않습니다. 예쁘장한 말을 잔뜩 넣는다 해서 읽을 만한 글책이 아닙니다. 빼어난 글솜씨를 선보인다든지 새로운 글재주를 부린다 해서 돋보이는 글책이 되지 않아요. 글 한 줄에 글쓴이 삶을 얼마나 땀흘려 녹여냈는가에 따라 글책이 달라집니다.

 그림책이라면 그림 하나에 그린이 넋과 숨결이 어느 만큼 짙게 배었는가에 따라 그림책이 달라집니다. 사진책이라 할 때에는 사진 하나에 사진쟁이 얼과 숨소리가 어느 만큼 깊이 스몄는가에 따라 사진책이 달라져요.

 말이나 그림만 예쁘장하게 꾸민다 해서 예쁜 만화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재들이 돋보이는 이야기로 꾸민다 해서 좋은 만화책이 되거나 재미난 만화책이 되지 않아요.

 만화이기에 어느 매체보다 생각날개를 펼쳐 꿈과 같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화이기 때문에 섣불리 생각날개를 펼친다거나 아무렇게나 생각날개를 퍼덕인다면, 그닥 재미나지 않을 뿐 아니라 싱겁거나 어이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글책도 그림책도 사진책도 만화책도 오직 이 삶터에 뿌리내립니다. 이 삶터에 두 발을 씩씩하게 디디며 태어납니다.

 글책은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펼칩니다. 그림책은 그림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뻗습니다. 사진책은 사진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보듬습니다. 만화책은 만화를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여밉니다.

 《피아노의 숲》 19권을 읽습니다. 드디어 19권째에 ‘이 만화 주인공’ 이찌노세 카이 피아노가 나옵니다. 만화쟁이 이시키 마코토 님은 《피아노의 숲》을 몇 권쯤 그릴 생각으로 ‘이 만화 주인공’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이토록 더디 조금만 그리는지 궁금합니다. 설마 《유리가면》처럼 그릴 생각으로 앞으로 스무 해쯤 더 그리지는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 ‘어쩜 이렇게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피아노가 있었다니.’‘설마 이 정도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이건 타고난 음악성인가.’ ‘이제 이 이상의 쇼팽은.’ “여보, 레프가 이렇게 멋진 연주를 하고 있어요.” ..  (7쪽)
- ‘이찌노세가 연주하는 음악은 어쩜 이리 자연스러운 걸까. 따뜻하고 그리워. 기분 좋은 리듬 때문에? 아니면 칸타빌레? 하모니의 센스?’ ‘아, 이건 폴란드 초원의 유채꽃밭인가?’‘봄에 일제히 싹을 틔우고, 노란색으로 땅을 물들이는 우리 폴란드의 유채꽃이란 말인가?’ (45∼46쪽)



 쇼팽을 기리는 피아노잔치에서 이찌노세 카이는 이찌노세 카이가 태어나서 자라온 나날을 피아노 하나에 고이 싣습니다. 이찌노세 카이가 선보이는 피아노는 ‘쇼팽을 기리는 넋’을 보여주되 ‘쇼팽을 기리며 피아노를 치는 이찌노세 카이’가 ‘이찌노세 카이대로 살아온 제 삶을 기리며 사랑하는’ 손길로 보여줍니다.

 쇼팽이라는 사람이 빚은 피아노 연주는 ‘쇼팽이라는 한 사람이 나고 자란 터전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는’ 손길로 태어났습니다. 쇼팽이 죽고 나서 쇼팽을 피아노로 선보이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쇼팽이 나고 자라며 느낀 숱한 삶과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피아노로 담도록 애써야겠지요. 그리고 이 쇼팽 연주에 ‘쇼팽을 연주하는 내 삶과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함께 담아야 합니다.

 나는 ‘쇼팽을 피아노로 들려주는 나’이지 ‘쇼팽을 똑같이 보여주는 쇼팽’이나 ‘쇼팽을 되풀이하듯 보여주는 녹음기’가 아니니까요.

 살아숨쉬는 한 사람으로서, 펄떡펄떡 뛰는 가슴으로 피아노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 쇼팽이 지난날 들판을 거닐며 당신 품에 안은 따사로운 너른 흙과 꽃과 바람과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날 들판을 거닐며 내 품에 안는 따사로운 너른 흙과 꽃과 바람을 소리마디 하나하나에 사뿐히 싣습니다.


- ‘야폰칙(일본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쇼팽을 동경하고 폴란드에 유학 온 일본인도 좀처럼 잡기 힘든 이미지인데, 유학 경험도 없이 어떻게 이런 마주르카를 칠 수 있는 거지?’ (47쪽)
- “왜냐면 이찌노세의 피아노만이 이 대회에서 규격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같은 열에는 세울 수 없게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찌노세를 남게 하려면 나머지 다른 참가자들을 전부 떨어뜨려야 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찌노세를 여기서 제외시키고 아마미야를 넣는 건 어떨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마미야에게는 훌륭한 이력이 있습니다. 이찌노세의 이력을 보면 어느 음악 전문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콩쿠르 이력도 없습니다! 국제콩쿠르도 전무합니다!” (163∼164쪽)
- “이 쇼팽 콩쿠르에서는 유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쇼팽을 연주해 내는 인재를 발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예비예선을 심사한 선생님들, 그리고 심사위원 여러분의 귀를 믿고 규정을 변경했습니다. 일본인 파이널리스트가 3명이 되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12명 중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재고할 여지가 있겠지요 …… 부다 자신이 심사위원에 뽑혔다는 긍지와 자각을 갖고 올바르다고 믿는 평가를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84∼187쪽)


 내 삶을 나 스스로 예쁘게 가꿀 때에 내 글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예쁘게 일굴 때에 내 그림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몸뚱이로 예쁘게 껴안을 때에 내 사진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다리로 튼튼히 딛고 서며 부둥켜안을 때에 내 만화가 예쁩니다.

 이찌노세 카이가 들려주는 피아노는 다른 ‘콩쿠르 참가자’ 피아노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온 터전이 달라서만은 아닙니다. 피아노 앞에 서며 연습을 하거나 나 스스로 피아노를 즐길 때에 내 매무새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피아노잔치에서 1등 연주를 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피아노잔치이니까 말 그대로 ‘피아노로 잔치판을 벌여’야지요. 내 모든 솜씨를 아낌없이 펼쳐 보이면서 나부터 내 피아노를 즐기고 내 피아노 소리를 듣고자 모인 사람들한테 가없이 눈물과 웃음을 선사해야지요.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노래잔치란 부질없습니다. 더 사랑을 나누고 더 사랑을 받으며 함께 기쁠 노래잔치여야 합니다. 더 눈길을 받거나 더 이름값을 올릴 사진잔치란 덧없습니다. 자랑을 하는 사진잔치가 아니라, 사진 하나로 사랑과 믿음과 꿈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일장이든 신춘문예이든 참 쓸데없습니다. 글잔치란 상금과 이름값을 거머쥐는 잔치가 될 수 없어요. 상금과 이름값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글잔치라 하면서 막상 글꽃 글숨 글빛 글무지개가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백일장이든 신춘문예이든 참 쓸데없어요.


- (이찌노세의 피아노는 도입부만으로도 대회장의 색을 바꿔 버렸다.) (41∼42쪽)
- ‘카이는, 카이는 어릴 적부터 대지에서 태어난 것 같은 작품에 뛰어났다. 숲의 피아노로 자란 카이는, 나도 알 수 없었던 마주르카의 마음과 한몸이 된 건지도 모르지. 자연의 대지는 폴란드만의 특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다 있는 거니까.’ (51∼52쪽)
- ‘“숲의 피아노”로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카이만이 낼 수 있는 소리.’ (86쪽)



 《피아노의 숲》 주인공인 이찌노세 카이는 ‘숲 피아노’를 들려줍니다. 왜냐하면 이찌노세 카이는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자라며 숲에서 먹고살았거든요. 숲에서 어머니하고 둘이 아름다이 살았거든요. 숲에서 숲 피아노를 사랑하며 숲 노래를 즐겼거든요. 숲에서 숲을 느끼며 쇼팽을 알았고 슈베르트를 보았거든요.


- “카이, 네 자신을 믿어라.” “네! 그럼, 치고 올게요.” (30쪽)
- (숲으로!!!) (62쪽)


 숲이란 이찌노세 카이한테 보금자리요 삶입니다. 숲에서 숲아이로 살아가며 숲노래를 피아노로 옮깁니다.

 쇼팽 콩쿠르에 나온 다른 아이들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도시내기로서 도시사람다운 꿈을 키우며 도시살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도시내기로서 자연을 노래하거나 만나더라도 겉스치는 자연일 뿐, 내(사람) 몸을 이루는 자연이 무엇인가를 환히 깨닫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을 낳아 키운 어버이부터 자연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니까요. 스스로 자연스럽지 못한 어버이들이 당신 아이들한테 어떤 자연을 들려주거나 물려주겠습니까. 스스로 자연을 사랑하지 못하는 어버이들이 아이들한테 무슨 자연사랑을 이어주겠습니까.

 쇼팽이든 슈베르트이든 모차르트이든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쇼팽을 잘 친다 해서 이름값을 드높이지 못합니다. 슈베르트를 빼어나게 옮긴다 해서 천재이지 않습니다. 모차르트를 훌륭히 들려준다 해서 ‘내가 모차르트가 될’ 수는 없어요.

 팡웨이는 팡웨이를 칠 뿐이고, 안창수는 안창수를 칠 뿐이며, 슈우헤이는 슈우헤이를 칠 뿐입니다. 중국사람이라서 더 낫거나 한국사람이라서 더 좋거나 일본사람이라서 더 훌륭하지 않아요. 저마다 제 삶과 목숨과 사랑을 예쁘게 돌보면서 즐거울 수 있을 때에 ‘쇼팽으로 피아노잔치’를 하든 다른 무엇으로 피아노잔치를 하든 예쁜 노래꽃을 피웁니다.


- ‘카이가 친 마지막 음은 나를 가로질러 황금색 여운을 뿌리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105∼107쪽)


 얌전뺑이로 자란 슈우헤이는 《피아노의 숲》 19권에서 피아노와 삶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느꼈을까 궁금합니다. 슈우헤이 ‘재주’로는 콩쿠르에 붙을 수 없는 줄 깨달았을까 궁금합니다. 슈우헤이는 ‘붙느냐 마느냐 1등하느냐 2등하느냐’ 같은 어리석은 생각에서 홀가분하지 않고서야 슈우헤이 피아노를 찾을 수 없는 줄을 알아차렸을까 궁금합니다. 부끄러운 나머지 이제부터 ‘내(슈우헤이) 피아노’를 찾아 ‘내 삶’을 가꾸며 사랑하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내 길을 걸을 때에 나를 사랑하면서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합니다. 내 길을 걷지 못할 때에는 나조차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동무를 참다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만화도 모두 사랑이 밑바탕입니다. 피아노 또한 사랑이 밑바탕이에요. 예쁜 만화는 예쁜 사랑을 밑바탕으로 삼아 태어납니다. (4344.4.17.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19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1.4.2./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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