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할머니, 그림 할머니
그림 할머님을 네 식구가 찾아뵙는다. 옆지기와 첫째 아이와 옆지기 몸에서 자라는 둘째 아이까지 해서 네 식구가 찾아뵙는다. 그림 할머님으로 당신 고마운 삶을 일구는 박정희 님은 올해로 여든아홉 살이다. 우리 식구는 박정희 할머님이 여든다섯 나이일 때에 처음 뵈었고, 나는 일흔두 살 나이일 때부터 박정희 할머님을 알았다.
여느 사람들은 그림 할머님인 박정희 님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아니, 안다기보다 이름을 들어 보기도 하고 이름을 못 들어 보기도 한다. 으레 독재자 박정희라는 사람을 떠올리지 그림 할머님을 떠올리지 못한다. 어떤 이는 미국사람 ‘모세 할머니(grandma Moses)’하고 박정희 할머님을 빗대기도 하지만, 박정희 할머님은 그대로 박정희 할머님이다.
박정희 할머니를 낳아 기른 아버님은 박두성이라고 여쭌다. 박두성 님은 일제강점기에 ‘한글 점글’을 만들었다. 흔히 ‘루이 브라이’라 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박두성 님하고 견주기도 하지만, 박두성 님은 고스란히 박두성 님이다. 루이 브라이라는 사람이 ‘맨 먼저 점글을 만든’ 사람이지는 않다. 점글을 맨 먼저 만든 사람은 따로 있을 뿐 아니라, 루이 브라이 님은 장님이 더 손쉽게 쓸 뿐 아니라 널리 쓸 만한 ‘알파벳 점글’을 만든 사람이다. 박두성 님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장님이 손쉽게 널리 쓸 만한 ‘한글 점글’을 만든 사람이다.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리라. 그러나 한글 점글을 만든 사람을 아는 한국사람은 매우 적다. 더욱이 한글 손말을 빚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란 훨씬 힘들다. 나도 아직 ‘한글 손말’을 빚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누가 한글 점글을 만들었는지 이름을 알든 모르든 얼마나 대수로운가. 한글 점글을 찍을 줄 알거나 읽을 줄 알아야지, 한글 점글을 만든 사람 이름만 안대서 무엇이 대단한가.
딸 넷 아들 하나한테 육아일기를 만들어 선물로 베푼 그림 할머님인 박정희 님을 떠올리거나 기리거나 모시는 일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름만 안다 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며, 놀랍거나 대단하다고 말해 보아야 무슨 뜻이 있는가. 나는 나대로 내 아이를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일굴 수 있으면 된다. 할머님은 할머님대로 할머님 삶을 사랑하고 고맙게 여기면서 할머님 삶을 일구었다. 할머님을 낳아 기른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넋을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사랑이 있기에 일제강점기라는 무시무시한 때에 한글 점글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이 있기에 다섯 아이에다가 여러 식구를 거느리면서도 그림그리기를 놓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이 있기에 여든아홉 나이에도 수채그림 교실을 마련해 당신 밥벌이로 삼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사람을 읽어야 한다. 사람을 읽는 사람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사랑을 읽는 사람은 삶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든 그림을 읽든, 또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매한가지이다. 글쓰기란 사람쓰기요 사랑쓰기이며 삶쓰기이다. 그림그리기란 사람그리기요 사랑그리기이며 삶그리기이다.
내가 박정희 할머님을 좋아하면서 할머님 매무새를 사진으로 담아 보기도 하는 까닭을 든다면, 할머님 스스로 할머님 삶을 사랑하면서 이웃사람과 예쁜 이야기꽃을 피우기 때문이랄 수 있다. 나는 나대로 우리 시골집에서 네 식구 올망졸망 복닥이면서 더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찾고 싶다. 그러나 어제 하루도 나는 우리 아이한테 골을 많이 부렸다. 이쁘다 이쁘다 하고 말해야 하지만, 어쩌면 나는 나한테부터 이쁘다 이쁘다 하고 말을 못하니까 내 아이한테든 옆지기한테든 이쁘다 이쁘다 소리를 좀처럼 못하는 삶에 허덕이는지 모른다. 할머님 말마디를 띄엄띄엄 수첩에 옮겨적었다.
“그렇게 굶어죽는 집에 시집을 가서 물지게도 못하고 밥도 못해요. ‘너는 그 상태로 시집 올 생각을 했니?’ 했는데, 나는 물지게하고 시집이 관계가 있는 줄 몰랐어. 딸 딸 딸 딸 낳으면서도 너무나 기뻐서, 너무나 예쁘고 말 잘 듣는다 말하면서 …… 나는 내가 하느님께 충성하는 만큼 이 아이들을 길렀는데, 적중했어요 …… 암만 생각해도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에요. 말을 안 들으면 죽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인 거를 봐요 …… 우리 남편은 상상도 못할 철부지 남편이었어. 나 없으면 밥도 안 먹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래도, 부모님 모시고 나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끝났어요 …… 이거 어떡하다가, 밥을, 그림 가르치며 먹는 셈이잖아 …… 그림을 그리며 보내잖아, 벅찬 거야, 이 희열의 순간들. 그림 그리는 시간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 많은 하나님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모자란데,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뭘 그리 감격해 해요?’ 하지만, 나는 그림 그리는 시간들이 소중하다고 …… 여기(화평동) 재개발 들어간다잖아. 문짝 팔아 먹고살 수는 없고, 남편이 병원 문 닫은 다음에 유치원을 할까 하다가,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어 힘이 없으니 아이를 들지를 못해 …… 내일 막내딸이 며느리를 얻어, 결혼식이야 …… 자기(막내딸)와 같이 예배 드리던 사람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 울어야지, 감사해서 ……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돼 … 요즘 사람들은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고, 다들 미쳤어 …… 어느 분이 시험에 붙었어. 그래서 나한테 전화를 하지. 내가 아주 좋아할 줄 알고 …… 그림은 하나님의 솜씨를 그리워하면서 하는 수작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 어떤 이가 밤 아홉 시까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더니, ‘안 돼요, 할머니 노동 착취 하면 안 돼요.’ 하고 다 보내요. 그러니, 그림을 그리던 분이 다 깔깔대요 …… 할머니가 좋아해서 미쳐서 그림을 그리니까, 이분들(나한테 그림을 배우는 분들)도 다 미쳐서 그리는데,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식구들도 다 좋아한대요. 화백이라고 불러 줘서 좋고, 집에서도 그림을 좋다 해서 좋고 …… 새로 목사님이 오셨는데 젊은 분이야, 목사님이 내 손주뻘 나이네. 아이고 예쁘다 그림 그리고 싶네요 하니까, ‘할머니 그림 그리세요?’ 해서, 네 그림 그립니다 하고는, 처음에 한 시간, 그리고 일 주일 뒤에 한 시간 더 그리면 액자 끼워서 드릴게요 했어 …… 그런데, 한 시간 그림을 그린 뒤에 목사님이 보고 이 그림 나 달라고 그래. 그래서 일 주일 뒤에 다시 와서 더 그려야 한다고 하는데 ‘더 그릴 게 뭐 있어요?’, 화가가 더 그릴 게 있다면 그런 거지요. 그러고 일 주일 뒤에 다시 와서 한 시간 더 그리니까 또 달라고 그래. 그래, 내가 처음에 한 시간 일 주일 뒤에 한 시간 그러고 나서 액자 끼워서 준다고 했지요 …… 그기(그 그림이) 하나님 작품이니까 좋지, 내 작품이니까 좋지는 않거든. 사람이건 자연이건 풍경이건 꽃이건, 내가 아이들을 기를 때에 늘 그렇게 길렀어요. 한 번도 ‘너 때문에 내가 할 일을 못했다’라거나 하지 않았어요 …… 맨날 애들보고 이쁘다 이쁘다만 했어요 …… 난 아이들 낳고 키우면서 돈은 못 벌고 사랑만 벌어 온 거 같아 …… 겉으로 미사여구를 잔뜩 늘어놓아도 뱃속으로 아시는 사랑이 하나님이다.” (4344.4.1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