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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요리사 111
우에야마 토치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좋은 삶으로 빚는 밥·만화·삶
[만화책 즐겨읽기 30] 우에야마 토치, 《아빠는 요리사 (111)》(학산문화사,2011)
자그마치 111권째 나온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일은 대단히 놀라운 기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저 권수로만 100권이 넘은 만화로 여길 수 있을는지 모르나, 100권이 넘도록 나오는 만화라 한다면 그저 따분하게 이어간다든지 억지로 잇는다고 해서 될 수 있지 않습니다. 100권이 넘도록 내는 기나긴 나날에 걸쳐, 이 만화를 읽는 사람들한테 즐거움과 기쁨과 눈물과 웃음을 고루 자아내기 때문에, 만화쟁이는 만화쟁이답게 즐겁게 그리고, 읽는이는 읽는이대로 기쁘게 읽습니다.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 111권을 읽습니다. 111권 마지막 쪽을 넘기니 112권도 손꼽아 기다리라는 글월이 적힙니다. 아마 112권이 나올 때에도 113권을 기다리라는 글이 적히겠지요. 아, 우리 나라에도 우리 삶터를 돌아보고 우리 이야기를 아로새기는 기나긴 만화 하나 태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우리 스스로 100권이녀 200권이며 사랑스러우면서 살갑고, 착하면서 참답다 싶은 만화 하나 빚을 수 있을까요.
- ‘굉장해.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 안 나와. 무서울 정도야. 아아, 난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헤엄치고 있어. 마치 바다와 하나가 된 것 같아. 행복하다.’ “자, 교대하자. 이번에는 켄지가 갈래?” “선배, 조개는요?” “산호가 하도 아름다워서 넋을 잃고 있었어.” (33∼34쪽)
- “그럼, 오늘까지만 여유있게 놀 수 있겠구나. 마지막 하루는 어떻게 보내고 싶어?” “으, 음, 혹시 가능하다면 또 바다에 가고 싶어요! 그 아름다운 바다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66쪽)
- “안녕, 또 왔단다. 아름다운 생물들아. 내 가슴에 깊이 새겨 놓을게.” (71쪽)
우에야마 토치 님이 그리는 《아빠는 요리사》 111권을 읽으면, 그림이나 줄거리가 몹시 부드럽습니다. 술술 넘어갑니다. 모두 열 꼭지 작은 이야기를 담은 《아빠는 요리사》 111권인데, 날마다 먹는 밥을 술술 받아들여 삭이듯, 작은 꼭지 이야기이며 작은 꼭지로 이루어진 만화이며 술술 즐길 만합니다.
어쩌면, 술술 넘어가도록 그리는 만화가 《아빠는 요리사》인지 모르며, 아빠 스스로 요리사가 되어 집식구한테 맛난 밥을 먹이면서 맛난 넋과 꿈을 심자고 그리는 만화인 까닭에, 이처럼 오래도록 살가이 그리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남다른 밥하기를 보여주는 만화가 아닙니다. 가장 맛난 밥이라든지 무언가 놀랍거나 새삼스럽거나 지구별 어디에도 없는 밥을 보여주는 만화가 아닙니다. 수수한 밥인데 수수하면서 좋은 밥이라고 느끼도록 이끕니다. 여느 밥인데 손길 한두 차례 더 사랑스레 스미면서 이제까지 미처 모르던 기쁨과 보람을 깨닫도록 돕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 만화가 잃거나 놓치는 대목이 이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더 예쁜 그림이나 무언가 새롭거나 남달라 보이는 줄거리를 다룬다 해서 돋보이는 만화가 되지 않습니다. 흔한 줄거리이면 어떻고 그림결이 조금 엉성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림이야 그리면 그릴수록 조금씩 나아지기 마련이니까,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를 한결같이 그리면서 차근차근 북돋우면 됩니다. 그림결은 아주 대단해 보일는지 모르나 발돋움하는 느낌이 없다든지, 그림결은 퍽 예쁘장하지만 정작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지 알 길이 없다면, 이런 만화는 만화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면, 만화가 못 되는 만화이기 앞서, 글이 못 되는 글이요, 사진이 못 되는 사진이며, 학문이 못 되는 학문입니다. 만화이든 글이든 사진이든 학문이든, 놀라운 글감이나 줄거리여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 “해수(바닷물)를 쓰세요?” “응, 한마디로 천연 간수지. 미야코에서도 가장 깨끗한 바다에서 떠와.” (49쪽)
- “잘 봐. 생선은 너무 힘껏 쥐지 마. 머리에서 꼬리 쪽으로 손을 겹치지 않게 잡는 거야. 그러면 지느러미와 가시에도 찔리지 않아.” “응. 선배, 저도 다시 도전해도 될까요?” (131쪽)
날마다 들이마시는 바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늘 마시는 물이 어떠할 때에 시원한가를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끼니마다 비우는 밥그릇에 담는 밥을 어떻게 마련해서 받아들여야 내 몸이 기뻐하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공기청정기를 쓴대서 좋은 바람이 되지 않습니다. 도시살이에 익숙해졌기에 매캐한 자동차 배기가스라든지 에어컨 내음이 내 몸이 좋을 수 없습니다. 먹는샘물을 사다 마시면 그만이 될까요. 먹는샘물이란 땅밑이나 바다밑에서 뽑아올리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마을 어느 동네에서라도 ‘흐르는 물’을 걱정없이 마실 수 없다면, 먹는샘물이란 우리한테 얼마나 좋은 물이 될까요. 집에서 노상 차려먹는 밥부터 알뜰히 돌보지 못한다면, 바깥에 나가 사먹는 손꼽히는 밥이 제아무리 맛난들 내 몸에 얼마나 보탬이 될까요.
- “근데, 너 예전에는 호박을 무서워하지 않았어?” “응, 괴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맛이랑 냄새가 싫었던 건 아니어서. 아빠가 여러 가지 맛있는 단호박 요리를 만들어 주신 덕분에 점점 좋아하게 됐어.” (107쪽)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이야기 한 자락이 사랑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내 아이하고 복닥이면서 부대끼는 하루하루가 사랑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한 줄 두 줄 한 쪽 두 쪽이 모두 사랑입니다. 뚜벅뚜벅 걷는 길이 언제나 사랑입니다. 콩나물 한 젓가락과 김치 한 쪽이 그예 사랑입니다. 숟가락질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흘린 밥알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스러운 밥알이 하나둘 모여 밥그릇 하나를 이룹니다. 밥그릇 하나로 이루어진 밥알들은 흙을 일군 사람들이 흘린 땀방울이 알알이 모인 사랑입니다. 밥알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깨닫지 못할 때에는, 지식조각이 그러모인 학문이든 책이든 얼마나 값있거나 뜻있는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든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그러니까 이 나라 숱한 사람들은 ‘숫자로 따지는 돈’에 따라 움직이고 맙니다. 숫자가 아닌 사랑으로 이루어진 사람이고 삶이며 터전인 줄을 으레 잊습니다.
돈 몇 푼 치러서 손쉽게 사먹는 밥이 아닙니다. 돈 몇 푼 내면 밥이고 물이고 바람이고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지 않습니다.
- “아직도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거야?” “예, 이건.” “돈 한 푼 안 되는 일을. 그렇지, 루리?” “예. 하지만 로맨틱해서 좋은 것 같아요.” (149쪽)
- “아유미. 성이를 좋아하니?” “비밀.” “그러냐?” (96쪽)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에 몸뚱이를 남기며 흙으로 돌아가서 거름이 됩니다. 내가 살아갈 기운을 북돋워 준 모든 목숨이 흙에서 비롯하여 내 두 다리가 흙을 딛고 설 수 있도록 해 주었듯이, 나는 눈을 감으면서 흙으로 돌아가서 고맙게 거름이 되어 흙하고 다시금 한몸이 됩니다.
내 마음이 내 삶을 살찌우는 흙하고 하나이기 때문에 내 목숨을 튼튼히 잇습니다. 내 마음이 내 삶을 보살피는 흙하고 어깨동무하기 때문에 내 목숨을 따스히 보듬습니다.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를 그리는 사람은, 이 만화를 그려서 무엇을 얻거나 누릴까요.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를 읽는 사람은, 이 만화를 보면서 무엇을 얻거나 누리려나요.
좋은 삶으로 좋은 밥을 차리고, 좋은 삶이기에 좋은 밥을 고맙게 맞아들입니다. 좋은 삶으로 좋은 사랑을 꽃피우고, 좋은 삶인 만큼 좋은 사랑을 예쁘게 나눕니다. (4344.3.6.해.ㅎㄲㅅㄱ)
― 아빠는 요리사 111 (우에야마 토치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1.25./4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