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 〈빨간머리 앤〉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를 사려고 했으나 모두 품절이 되어 몇 해 앞서부터 장만하지 못했다. 고작 하나만 겨우 장만했는데, 이 디브이디 하나는 인천에 살던 때에 이마트에 갔다가 하나 보여서 장만한 녀석. 1편부터 5편까지만 있으니 이 디브이디를 보면 늘 1편부터 5편까지만 볼밖에 없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누군가 고맙게 올려준 파일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다시 본 적이 있다.

 요즈음, 아이는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에 꽂혀 날마다 이 만화영화를 또 보자고 한다. 오늘 아침에도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를 상자에서 꺼내어 제가 셈틀에 넣는다며 낑낑댄다. 그러나 아이가 디브이디를 넣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디브이디를 손가락으로 비벼대서 손그림 자국이 가득 묻었기 때문. 아버지는 옆에서 “벼리야, 아직은 네가 넣으면 볼 수 없어.” 하고 말한다.

 디브이디를 꺼낸다. 사진기 렌즈를 닦는 두꺼운 천으로 디브이디 앞뒤를 깨끗이 닦는다. 다시 넣는다. 영화가 돌아간다. 〈빨간머리 앤〉 2편에서 앤이 풀빛지붕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에 앉으나, 사내아이 아닌 계집아이가 이 집에 와서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슬프고 서러워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앤은 “저요, 2년 전에 초콜릿을 하나 먹어 봤는데 아주 맛있었어요.” 하고 덧붙인다. 이러면서 이태 앞서 먹은 초콜릿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이 맛을 틈틈이 떠올린다고 얘기한다.

 이때에 마릴라와 매튜 얼굴이 참 볼 만하다. 왜냐하면 두 사람으로서는 ‘아이들이 초콜릿이라는 먹을거리를 자그마치 이태 앞서 처음으로 맛을 보고 다시는 먹은 적이 없는데, 이토록 애타게 그리는 마음’을 이제껏 겪거나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빨간머리 앤〉은 외롭고 불쌍한 ‘고아 소녀’ 한 사람 이야기를 보여주는 만화영화는 아니다. 틀림없이 앤은 ‘외롭고 불쌍하다’ 할 아이라 할 만하고, ‘고아 소녀’이기도 하다. 이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니까. 그러나 ‘주인공 삶’은 이러하지만, 정작 〈빨간머리 앤〉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외롭고 불쌍한 아이가 얼마나 외로우며 슬픈가’ 하는 대목이 아니다. 언제나 착하며 예쁘게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해맑은 넋이란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둘레 사람들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가 하는 대목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만화영화는 하얀 빛이 감도는 잇빛 능금꽃으로 가득한 길을 얼마나 어여삐 담아서 보여주는지 모른다. 소설은 소설대로 내 나름대로 시골마을 삶자락을 꿈꾸거나 생각할 수 있어 즐겁고, 만화영화는 만화영화대로 앤이라는 아이가 깃들어 지내던 시골마을 삶자락을 눈부시게 만날 수 있어 즐겁다.

 3편에서 앤이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다음 이불을 치우려 하는데 제대로 치우지 못한다. 뒤에서 마릴라가 “설거지는 잘 하지만 침대 정돈은 못 하는구나.” 하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새털이불에서는 잠자 본 적이 없거든요.” 하고 대꾸한다. 참 스스럼없어 좋고, 이 스스럼없는 맑은 넋을 고이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듯 껴안아 주니 좋다. (4344.2.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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