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 봐서 아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철없던 적이 있기 때문에 철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보곤 합니다. 왜냐하면 손가락 끝이 다친 적 있기 때문에 손끝 한 번 다치면서도 얼마나 고달픈가를 깨달으니까, 손끝이 아닌 팔 하나 잘린다든지 다리 하나 부러진다든지 하면 어느 만큼 괴로우면서 힘든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끝이 아파 보았기 때문에 팔이 잘리는 사람 아픔과 괴로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렴풋이 헤아릴 뿐입니다. 똑같이 팔이 잘려서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팔이 잘리는 아픔을 알 수 없어요.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떠할까요. 같은 책을 읽었기에, “나, 그 책 읽어 봐서 아는데요.”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같은 영화를 보았기에, “나, 그 영화 한번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사랑을 해 본 사람이기에, “나, 사랑 한번 해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읊을 수 있을는지요.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나, 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아는데요.” 하고 말해도 괜찮을까요. 아이를 둘이나 셋, 넷이나 다섯, 여섯이나 일곱을 키운 어버이는 아이키우기를 한결 잘 안다 할 수 있는가요.

 야구를 일곱 해쯤 지켜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만할까요. 야구를 열일곱 해쯤 돌아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수 있나요. 야구를 스물일곱 해나 서른일곱 해, 또는 마흔일곱 해나 쉰일곱 해쯤 바라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해야 하나요.

 깊이 있게 보아서 좋을 때가 있고, 두루 보아서 나을 때가 있으며, 오래 보아서 훌륭한 때가 있습니다. 살짝 보아서 알맞을 때가 있고, 사랑스레 보아서 기쁠 때가 있으며, 따스히 보아서 즐거울 때가 있어요. 읽기에 따라 다른 삶이고, 읽는 매무새에 따라 새로운 삶이에요.

 읽어 본 사람은 틀림없이 읽었기에 아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아직 못 읽었거나 곧 읽으려 하거나 애써 읽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 나름대로 무언가 가슴으로 느끼거나 보듬으려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모든 책은 앎(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책읽기는 앎읽기(지식쌓기)가 아닙니다. 모든 책은 삶이고, 모든 책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삶을 읽는 책이기 때문에, “읽어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이한테는 여태껏 살아 봤으니 “그이가 살아온 나날”을 알겠지만, 이이한테는 “이이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은, 참말 앞으로 살아 봐야 아니”까 어느 누구도 이이한테 ‘네 앞날이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거나’ 하고 섣불리 짚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이가 살아왔다는 나날조차 그이 스스로 얼마나 잘 안다 밝힐 수 있을는지요.

 이렇게만 살라는 법이 없는 나날처럼, 이렇게만 읽으라는 법이 없는 책입니다. 책은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대로 읽습니다. 책은 사람들마다 꾸리는 삶자락대로 엮어서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에 따라 책을 받아들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를 고이 담아 책을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삶에 따라 내 삶을 읽지, 책을 쓴 사람 삶을 읽지는 않거나 못합니다. 책을 쓴 사람 삶은 책을 쓴 사람만 압니다. 그러니까, 책을 쓴 사람 넋과 마음을 ‘책 읽는 이’가 알 수 없을 뿐더러, 어설피 비평이나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나는 이 책 하나를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어떻게 돌보겠다’ 하고만 말할 뿐입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란 없습니다. 좋은 내 삶이냐 나쁜 내 삶이냐만 있습니다. 아, 어쩔 수 없이 이 땅에는 나쁘다 할 만한 책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나쁘다 할 만한 책들조차, 이 책을 쥐어든 사람이 어떻게 삭여내거나 곰삭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사랑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사랑을 바꿉니다. 삶이 책을 바꾸고, 책이 삶을 바꿉니다.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는 책이란 내 삶을 사랑하는 넋이 더욱 따숩고 넉넉하도록 이끌고,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으며 꾸리는 내 삶은 내가 손에 쥔 책이 사랑씨를 고이 나눌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 줍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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