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책·삶·글
새벽에 글을 써서 누리집에 걸칠 때에 느낌이 좋다. 새벽 두 시나 세 시나 네 시 무렵이라는 시간이 새겨질 때에는 무언가 새삼스럽다. 글을 마치면서 내 글 끄트머리에 날짜를 적바림하지만 시간까지는 적지 않는다. 누리집에 글을 걸칠 때에만 몇 시 몇 분에 걸치는 글인가 자국이 남는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고 난 다음에 시간을 함께 적으면 한결 새삼스러울 수 있겠구나 싶다. 내가 어느 때에 이렇게 생각하거나 마음을 쏟으면서 이야기 하나 풀어냈는가를 더듬는 보람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굳이 몇 시 몇 분 글이라고 안 밝히더라도 내 글에 이러한 때가 살포시 묻어나도록 하면 넉넉한 일인지 모른다. 시시콜콜 밝혀 적어야만 알 수 있다면, 이런 글을 글이라 할 수 있는가. 지식쪼가리나 정보조각일 뿐 아닌가. 글이란 삶인데, 삶을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이라는 숫자놀음으로 밝힐 수 없다.
가만히 보면, 삶이란 책으로 알아채거나 읽을 수 없다. 책을 더 읽는다고 더 빼어난 삶이 아니고, 책을 덜 읽는다고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책을 가까이한다 해서 아름다운 삶이 아니요, 책하고 동떨어진 채 일한대서 못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애써 책을 말해야 할 까닭이 있는가. 애써 책을 생각하거나 돌아볼 값어치가 있을까.
책은 그예 책이기도 하지만, 책은 사람이기도 하다. 책은 종이뭉치이면서 삶이기도 하다. 사람은 고운 목숨이기도 하나, 숱한 이야기보따리이기도 하다. 사람은 삶이면서 죽음이다. 책을 보며 사람을 느끼고, 사람을 느끼며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가운데 사람 삶을 돌아보고, 사람 삶을 돌아보다가는 책을 살핀다.
책 하나는 고운 이웃이다. 이웃사람 또한 고운 책이다. 책이란 살가운 이야기꽃이다. 이야기꽃은 살가운 사람한테서도 마주한다. 책은 온통 사랑이다. 이웃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또한 온통 사랑이다. 책에는 하느님이 깃들고, 하느님한테는 책이 깃든다. 우리 아이한테도 하느님이 깃들며, 우리 옆지기한테도 하느님이 자리한다. 더 많은 책을 읽거나 더 많은 글을 쓰자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믿거나 보살필 꽃과 열매와 꿈과 이야기가 어우러질 삶을 살펴야겠다고 다짐한다. (4344.1.17.달.ㅎㄲㅅ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