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게 글쓰기
며칠 동안 아이하고 몹시 복닥이며 집일로 지치는 바람에 글을 거의 못 썼다. 글조각은 붙잡지만 정작 쓰려 하던 글이나 막상 써야 할 글은 못 쓰며 지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날 보내고 난 오늘 새벽에 글 하나 붙잡으면서 문득 느낀다. 힘든 나날을 보내기에 힘든 나날 힘든 손길이 글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나만큼 힘들다거나 나보다 더 힘들다거나 나와 비슷하지는 않을지라도 여러모로 힘들 사람들 삶결에 따라 책이나 사진이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헤아리면서 글을 쓴다.
몸으로 힘들게 살아내지 않고서 머리만 굴려 글을 쓸 때에는 나부터 썩 좋아할 만한 글을 쓸 수 없다. 나는 내 삶을 글로 꾸밈없이 적바림할 때에 즐겁다. 내 삶이 힘겹든 벅차든 고되든 내가 살아가는 결을 사랑하면서 글을 써야 내 글을 내가 사랑할 만하다.
입으로 떠드는 글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하는 글이 좋다. 이론으로 재거나 따지는 글이 아니라 살내음 묻어나고 살내음 나누는 글이 좋다. 따지고 보면, 나는 내가 쓴 글이라서 내 글을 좋아할 수 없다. 참다이 쓰거나 착하게 쓰거나 곱게 쓴 글이라면 내가 쓴 글이든 옆지기가 쓴 글이든 다른 어느 누가 쓴 글이든 좋다. 글은 글로 읽을 뿐이요, 책은 책으로 만날 뿐이며, 사람은 사람으로 살필 뿐이다.
엉터리로 살아가며 엉터리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주 많다. 이들 엉터리 가운데에는 헌책방을 깎아내리는 글을 쏟아낸다든지 헌책방 맛과 멋을 하나도 모르는 채 어설피 글솜씨를 부리는 이들이 꽤 많다. 이들은 스스로 제살을 깎는 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헌책방이라는 책쉼터에서 얻거나 누리거나 나눌 아름다움은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스로 슬프게 살며 슬픈 글로 슬픈 몸짓을 하는 셈이다. 이들은 엉터리로 살며 엉터리로 글을 쓰기에 엉터리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몹시 소름이 돋는다. 이 소름은 이들 엉터리 때문에 돋지만은 않는다. 나 또한 언제라도 이들과 같은 엉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지 않거나 내 가슴을 착하게 쓰다듬지 않거나 내 사랑을 따스히 보살피지 않는다면, 나부터 바로 오늘부터 엉터리 떠벌쟁이나 어설픈 글쟁이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고맙다. 모든 글은 고맙다. 모든 책은 고맙다. 모든 하루는 고맙다. 그렇지만 힘들기는 참 힘들다. 엉터리 사람들이 힘들게 몰아세우고, 엉터리 글로 눈알이 어지러우며, 엉터리 책 때문에 살가운 책들이 묻히니 안쓰럽다. 그래도 오늘 아침 또한 새삼스레 맞이하며, 쌀을 불려 밥냄비에 안치고 아이랑 새롭게 복닥이며 밥을 먹일 테며,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살짝 마실을 다녀와야지. 힘드니까 힘들게 산다. 가난하니까 가난하게 산다. 책을 좋아하니까 책을 좋아하며 산다. 아이와 옆지기를 사랑하니까 아이와 옆지기를 사랑하며 산다. 엊저녁에는 몹시 힘들고 지친 나머지 형광등 불빛이 너무 따가워 큰방에서 혼자 뻗고 말았다. 살짝 눈을 붙였다가 식구들이 잠들면 작은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그만 새벽 네 시 오십 분까지 죽은 듯이 곯아떨어졌다. 그래도 고맙게 보낸 하루요, 고맙게 새로 여는 하루이다. (4344.1.15.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