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위대한 소리들 작고 위대한 소리 시리즈
데릭 젠슨 지음, 이한중 옮김 / 실천문학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착한 마음으로 시골을 사랑하기
 [환경책 읽기 24] 작고 위대한 소리들


- 책이름 : 작고 위대한 소리들
- 글 : 데릭 젠슨
- 옮긴이 : 이한중
- 펴낸곳 : 실천문학사 (2010.4.16.)
- 책값 : 16000원



 (1) 고마운 삶


 아이는 어김없이 아침 일찍 깨어납니다. 아이 몸으로 보았을 때 너무 일찍 깬다 싶은데, 아이는 쉬가 마렵다 한 번 깨고 물을 마시겠다 두 번 깹니다. 쉬를 누인 뒤 다시금 자리에 눕히고 물을 마시도록 한 뒤 거듭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를 눕히고 아이 오줌을 치우려고 마당으로 나오니 온통 하얀 빛깔입니다. 밤새 새롭게 눈이 내렸습니다.

 오줌을 거름통에 붓고 빗자루를 듭니다. 집식구가 뒷간에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집부터 뒷간까지 가는 길이라도 쓸고 들어가자 생각합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비질을 쓱쓱 합니다. 장갑을 안 끼었으나 손이 시리지 않습니다.

 하품을 하면서 눈을 씁니다. 오늘은 엊그제 눈을 쓸 때보다 비질이 무겁습니다. 엊그제는 온통 꽁꽁 얼어붙은 눈이라 가볍게 쓸렸으나, 오늘은 눈이 바닥 쪽은 솔솔 녹는지 무겁습니다. 살짝 질척한 눈은 비질을 할 때 꽤 힘겹습니다. 조금만 쓸면 그리 힘들지 않으나, 우체국 일꾼이나 택배 일꾼이 들어설 자리까지 길을 쓸자면 허리가 시큰합니다.

 마음은 ‘나도 조금 더 자고 이따가 더 쓸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몸은 ‘이따 쓸 때에 조금 덜 쓸도록 몇 미터만 더 쓸자’면서 자꾸 움직입니다. 어둑살이 아직 깔린 조용한 멧골자락 길을 꾸벅꾸벅 비틀비틀 하면서도 신나게 씁니다. 쓸다가 허리를 토닥이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설마 조금 뒤에 눈이 더 내리지는 않으려나. 애써 쓸었는데 눈이 다시 오면 다시 쓸어야 하잖아.

 하늘을 믿자(?)고 생각하며 마저 씁니다. 한참 바깥에 있으나 손은 안 시립니다. 따뜻한 눈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며 군대살이를 하던 나날 눈하고 얼마나 오래도록 씨름했는지를 떠올립니다. 쓸고 또 쓸어도 다시 쓸어야 하던 눈이라 지겹도록 쓴다기보다 그냥 밥 먹고 쓸고 근무 서다 쓸며 자다 쓸던 눈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쓸고 또 쓸어야 하던 눈이었어요. 그때를 떠올리면 이런 눈쯤이야 아무것 아니지 하고 되뇝니다.


.. 우리 아닌 모든 생물종과 생태계는 그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벨리즈에 가서 재규어를 봤을 때, 그 재규어는 자기 자신이 관찰될 만한 야생동물이라거나 내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의식이 없었어요 … 어떤 식으로든 산처럼 생각하는 법을 기억해 내야 하고, 어떻게든 늑대를 대신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지배문화는(식민화된 정신은) 자연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모든 자연의 민족들과 전쟁 중일 수밖에 없습니다 ..  (22, 30, 167쪽)


 여러 날째 물이 녹지 않습니다. 눈을 쓸고 들어왔으나 손을 씻지 못합니다. 어제 길어 놓은 물로 한손만 살짝 씻고는 쌀을 냄비에 붓습니다. 물을 아껴 쌀을 씻은 다음 불립니다.

 10리터들이 물통을 들고 멧중턱에 자리한 이오덕학교로 날마다 물을 길러 오르내립니다. 물이 녹을 때까지는 하는 수 없이 길어서 써야 하고, 설거지나 빨래도 가방에 짊어지고 가서 해야 합니다. 아이를 씻길 때에도 고단하고 집식구 또한 몸을 씻기 어렵습니다. 물을 살짝만 틀어 놓는다고 하다가 그만 얼어붙었습니다. 물 아깝다는 생각이 아니라 물 얼지 않을 걱정으로 더 틀었어야 했으니, 아빠가 잘못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생각이 아직 글러먹었습니다. 마음이 어설프니 몸을 고단하게 움직일 노릇이지만, 혼자만 고단하면 좋으나 다른 식구들까지 고단하게 하니 참 형편없습니다.

 형편없는 아빠는 빨래거리와 설거지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날마다 멧길을 오르내리며 생각합니다. 형편없는 살림살이 때문에 모두들 힘들게 하지만, 이렇게 힘든 일을 겪으면서 물씀씀이를 다시금 돌아봅니다. 몸으로 뼈저리게 여러 날 복닥이면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쓰던 지난날 삶을 되짚습니다. 수도물 아닌 우물물 쓰던 예전 달동네 사람들도 빨래며 설거지며 밥하기며 씻기며 몹시 힘겨웠겠지요. 참말, 우리들은 언제부터 수도물을 이리도 홀가분하며 가뜬하게 쓰며 지냈으려나요. 집에서 느긋하게 물을 써서 좋은 일이기는 한데, 집에서 느긋하게 물을 쓰면서 물 고마운 줄을 얼마나 헤아리려나요.


.. 환경문제에 관한 이미지를 다른 속셈으로 이용하여 우리를 흡수하려는 것이지요. 그게 우리 소비사회의 천재적인 능력입니다. 소비사회는 로큰롤을, 민권을, 노동운동을 다 그런 식으로 흡수하여 맥주를 팔아먹기 위한 수단으로 바꿔 버렸어요 … 소비사회는 대규모 인구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 돈이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는 유일한 지표가 되게 하고 바람직한 것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위계구조를 만드는 것이지요 ..  (36, 40, 41쪽)


 어제 읍내 마실을 하면서 언명태 한 마리 이천 원에 샀습니다. 미더덕도 함께 사려 하니 미더덕은 덤으로 얹어 주었습니다. 아이가 잘 먹는 새우살도 한 봉지 오천 원에 삽니다. 오늘 아침에는 언명태와 새우살과 무를 넣고 조개살이랑 새우젓으로 간을 내는 찌개를 끓일 생각입니다. 애 엄마 먹을 찌개는 나중에 김치국물을 부어 매운맛이 돌도록 따로 차리려 합니다. 아이랑 아빠가 먹을 찌개는 맑은국으로 합니다.

 날마다 거의 똑같은 찌개나 국만 끓이는 아빠 살림살이란, 그닥 미덥지 못한 살림살이인데 좀처럼 다른 찌개나 국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익숙한 대로 끓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 내 몸과 식구들 몸을 더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내 몸을 더 사랑하거나 생각한다면 내 몸이 바라거나 내 몸에 좋을 밥거리를 장만하려고 힘쓸 테니까요.

 장마당 아주머니가 큰칼로 언명태를 툭툭 끊어 봉지에 담는 모습을 아이랑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무뚝뚝한 듯 볼 수 있으나 무뚝뚝하지 않은 칼놀림처럼, 나 또한 집에서 아침을 차리고 저녁을 마련할 때에 일 분이나 십 분을 아까워 할 노릇이 아니요, 일 분이든 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기꺼이 쓸 노릇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하루요, 고마운 나날을 선물받아 보내는 삶이라면, 더 흐뭇하고 기쁘게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하고 아이를 씻길 노릇입니다.


.. 이라크전쟁을 보십시오. 거기엔 인간이란 없었다는 듯 보도가 되었어요. 20만 명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뉴스가 되지 못했어요 …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흉내내는 건 지당한 일이지요. 그건 인류가 지금까지 언제나 행동하는 법을 배워 온 방식 중 하나이니까요 … 텔레비전을 볼 때 그 경험은 자연의 유기적인 시간을 느끼는 것처럼 차분한 게 절대 아니에요 … 자연에 흐름을 맞추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고 조용해질 필요가 있어요 … 이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자연의 세계보다 빠릅니다 … 사람들이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세계와 친화적인 존재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내 생각엔 사람들의 모습도 더 단순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  (117, 120, 121∼123쪽)


 집일이란 끝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하는 집일을 하다 보면 하루해가 꼴딱 넘어갑니다. 그렇지만 집일은 사랑이기 때문에 끝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일입니다.

 내 한 목숨 어느 날 고이 잠든 채 다시 깨어나지 못할 텐데, 깨어나지 못할 마지막 날까지 즐겁게 꾸릴 삶입니다. 사람이란 죽음을 바라보며 꾸리는 나날이 아닌 삶을 헤아리며 꾸리는 나날이니까요. 고단하면서 좋은 삶이고, 홀가분하면서 좋은 삶입니다. 슬프기에 고마운 삶이고, 기쁘기에 고마운 삶입니다.


 (2) 즐거운 삶


 집식구하고 큰방을 치웁니다. 바닥에 불이 들어오는 자리에 따라 책꽂이를 옮기고 깔개와 담요를 새로 옮겨 깔아 놓습니다. 그동안 이리 바쁘고 저리 힘들다는 핑계로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던 집살림을 추스릅니다. 겨울이라 큰방 바닥이며 작은방 바닥이며 담요와 깔개를 잔뜩 깔고 이불을 얹었는데, 하나하나 더 털며 숫자를 헤아리니 열여섯 장입니다. 홀로 깔개 담요 이불을 다 털자니 팔이 후덜덜합니다.

 낮에는 눈을 두 번 더 쓸고 밀었습니다. 애써 쓴 눈이지만 다시금 눈이 내려 더 쓸어야 했습니다. 아침 아홉 시 무렵부터 저녁 여덟 시 즈음까지 옴팡 집일로 빙글빙글 돕니다. 저녁에 자리에 누우려니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시는 데가 없습니다. 불을 끄고 아이랑 마지막 부대낌질을 하다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듭니다. 애 아빠도 아이도 집식구도 어느덧 곱게 잠듭니다. 몇 시간을 내처 잤을까 알 수 없는 깊은 새벽에 깹니다. 쉬를 하러 바깥으로 나옵니다. 오늘 밤도 날은 차기만 하니 얼어붙은 물이 녹자면 까마득합니다. 반토막에서 홀쪽하게 기운 달을 올려다봅니다. 초승달이지만 꽤 밟습니다. 하늘에 걸린 뭇별도 밝습니다. 구름 하나 보이지 않으며 꽁꽁 언 하늘이고 땅이며 바람이자 숲입니다. 오슬오슬 떨며 한동안 앞마당에서 서성이다가 집으로 들어옵니다.

 작은방 온도가 13도가 되어 보일러가 돕니다. 물은 얼었다지만 보일러까지 얼면 큰일이니 겨우내 틈틈이 보일러를 돌려야 합니다. 12월 3일에 300리터를 넣었는데 얼마쯤 이 기름으로 버틸 수 있나 어림합니다. 한 달을 버티면 하루에 10리터씩 쓰는 셈이요, 하루에 만 원 즈음 쓴 셈입니다. 두 달을 지내면 하루에 5리터씩 쓰는 셈이면서, 하루에 오천 원 즈음 나가는 셈입니다. 기름을 다른 여느 집보다 많이 쓰는지 적게 쓰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살림에 걸맞게 기름을 쓰며 겨울나기를 합니다.


.. 우리는 아이들을 정해진 길로만 가도록 훈련시키기 때문에 어느 연령이 지나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게 도무지 어려워지지요 … 도대체 왜 이끼가 풀이 자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풀은 작은 나무들이 자랄 여건을 만들어 준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들은 정말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 아이들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자체를 즐기며 친구들과 함께 운동을 하게 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단원처럼 행동하도록 학대를 당하게 됩니다 ..  (57, 64, 65쪽)


 펑펑 내리는 눈을 집에서 온식구가 내다보며 생각합니다. 집식구는 눈이 참 멋스러이 내린다고 말합니다. 저도 눈은 우리를 멧골자락에 꽁꽁 가두어 놓도록 내린다고 느끼지만, 다른 눈길로 보면 더없이 멋스럽습니다.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조용히 쌓이고 바람에 따라 이리 날거나 저리 춤추는 눈결은 무슨 그림이고 무슨 사진이려나요. 어떠한 그림과 사진이 눈내리는 결을 담을 수 있으려나요. 흩날리는 눈송이 결을 춤이나 가락으로 옮길 사람이 있으려나요.

 눈이 솔솔 내리던 한낮에 아이하고 마당에 나오고 집 앞쪽 길에 나왔습니다. 아이는 마음껏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눈길을 즐깁니다. 아빠는 함께 눈길을 즐기지 않습니다. 어른이 눈을 밟은 자리는 쓸거나 치우기 어렵거든요. 아빠는 목에 사진기를 걸고 손으로는 비질을 합니다. 언제쯤부터였나 잘 떠오르지 않으나,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는 “아빠, (사진) 찍어 줘.” 하는 말을 합니다. 눈밭에서 뛰어다니다가 문득 멈춰서는 이 말을 읊습니다.

 아이는 하얀 눈에 제 발자국을 이리 남기고 저리 남깁니다. 발자국 남기기가 재미나는가 봅니다. 아빠는 아이가 발자국을 남긴 데를 슥슥 씁니다. 제 발자국이 지워지자 다른 데에 또 남깁니다.

 요 장난꾸러기라고 할 만하지만, 그냥 놀이라 하겠지요. 어른이야 길이 미끄러울까 걱정이지, 아이야 길이 미끄러우면 미끌미끌 놀면 됩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고, 넘어져서 다치면 며칠 기다려 낫기를 바라면 됩니다.

 눈이 내린다며 우체국 일꾼도 안 오고 택배 일꾼도 오지 않습니다. 여느 면내나 읍내라든지 여느 시골마을까지만 해도 우체국 일꾼이나 택배 일꾼은 바지런히 돌아다니겠지요. 딱히 찾아드는 사람이 없고, 애써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참으로 조용하면서 참으로 호젓합니다. 이 둘레에 우리 땅은 한 뼘조차 없으나, 이 멧자락과 숲과 눈길은 온통 우리 놀이터입니다.


.. 사람들이 자기 신체로부터, 자기 체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제국의 건설자들은 그 빈자리를 소비재나 군사적인 승리로 채울 수 있지요 … 환경이 피폐해지면 사람이 안정감을 잃게 돼요. 그리고 환경이 그곳에 머물러 살기에 부적절하면 환경을 가꾸고 살거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이유가 없어지지요 … 길들인 식물만 있는 잔디밭, 가로세로로 쭉쭉 뻗어 있는 도로, 공간을 가려 버리는 건물들 같은 경관만 보다 보면 우리가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요 ..  (96, 201, 212쪽)


 물을 긷거나 눈을 쓸러 이오덕학교를 오르내리자면, 우리 집 있는 자리에서 볼 때하고는 사뭇 다른 눈나라입니다. 그리 안 높은 산이랄지라도 멧골로 더 깊이 들어서면 가없다 싶을 눈밭 눈꽃 눈나무 눈하늘입니다.

 옆지기가 몸을 조금 더 다스릴 수 있으면 함께 이 눈나라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읍내로 돌고 돌아 가는 시골버스라도 탈 수 있으면 읍내 가는 멧길을 구비구비 돌며 또 다르게 펼쳐진 눈나라를 즐기겠지요. 얕은 산인 탓인지 이곳으로 산타기를 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산자전거를 즐기겠다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사람들은 더 크거나 깊은 산으로 찾아들 뿐입니다. 충청북도 음성으로 산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요. 강원도로 가든 속리산으로 가든 지리산으로 가든 하겠지요. 그러니 이 멧자락이며 멧길이며 온통 우리끼리 즐깁니다. 마을 할매랑 할배를 빼면, 젊은이는 우리 식구만 타는 시골버스는 노상 우리 식구끼리 차지하는 큼직한 택시 같습니다. 읍내에 뭔가 볼 만한 구경거리가 있지는 않으나, 읍내로 오가는 이 길이 좋습니다. 나무를 보고 비탈논을 보며 큰 못물을 보는 길이 좋습니다. 나무숲 사이를 달리는 길이 좋습니다.

 추운 겨울 지나고 새봄을 맞이하면 이제 이 길을 아이는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신나게 오가야지요. 오뉴월에는 둘째 아이를 맞아들여야지요. 둘째는 백일을 보내고 제 두 다리로 막 서고 싶어할 즈음 제 언니랑 마찬가지로 시골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야, 눈이다.’ 하고 외치며 방방 뛰겠지요.


.. 사랑받지 못한 과거 때문에 스스로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자기 증오에 희생될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 최고위층 인사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아 훈련은 공감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에요.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엘리트가 그렇게 공감하는 능력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법을 배우는 게 대단히 중요해요 ..  (232, 250쪽)


 애 엄마는 잠자리에서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애 아빠는 눈을 쓰는 마당과 한길에서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애 엄마는 여러 날 걸려 뜨개질로 아이한테 양말 한 켤레 마련해 줍니다. 애 아빠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 아이한테 내어주고 날마다 아이 옷을 갈아입히며 살아갑니다.


 (3) 《작고 위대한 소리들》 즐기기


 데릭 젠슨이라는 미국사람이 미국땅에서 생태·환경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열두 사람을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 《작고 위대한 소리들》을 읽습니다. 번역에 더 마음을 쏟아 한결 쉬우며 살갑도록 가다듬는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지만, 이만 한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일로도 고맙습니다. 언제나 그러한데, 창작을 하든 번역을 하든 이 책을 ‘열두어 살 내 아이’나 ‘여든 고개에 접어든 내 어버이’한테 읽힌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참말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린이와 어르신하고 함께 읽을 책이라 할 때에는 어떤 눈높이로 어떤 글을 쓰겠습니까. 아이 앞에서 “야생의 자연이 지배하는 천연적이고 마술적인 세상이 부활하는 비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39쪽)” 같은 말투를 내뱉아도 되겠습니까. “인간만이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런 관념이어서(45쪽)” 같은 겹말 투를 버젓이 써도 되겠습니까. “뉴턴적인 사고방식(87쪽)” 같은 말투를 아이들이 배울까 두렵습니다.

 ‘작으면서 거룩한’ 소리는 따스하면서 넉넉한 소리입니다. 작으면서 거룩한 소리는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작으면서 거룩한 소리는 착하면서 참다운 소리입니다.


.. 진보는 신화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관념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 지금 우리는 오로지 지식을 위해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너지와 돈과 시간과 땅과 아름다움을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 지금 환경운동가들은 들을 줄을 몰라요. 우리는 이른바 반대편만큼 강고하고 공격적인 언사를 구사하고 있어요. 저는 그 모든 대립의 관념이 해체되고 더 이상 ‘우리’와 ‘그들’ 사이의 그림자 춤이 없어지면 좋겠어요. 서로의 말을 들어주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신은 무얼 원하십니까? 우리가 아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걱정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할까요? 우리는 자기 삶터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  (48, 91, 269쪽)


 《작고 위대한 소리들》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미국사람은 예부터 미국땅에서 뿌리내렸던 토박이를 총칼로 죽이고 술담배로 녹여내면서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한테서 ‘작고 거룩한’ 소리를 귀기울여 듣고는 책으로 엮곤 했습니다. 이제 더는 미국 옛 토박이한테서 작고 거룩한 소리를 들을 길은 없으리라 봅니다. 미국사람 스스로 작고 거룩하게 살아내면서 작고 거룩하다 싶은 소리를 일구어야 합니다.

 이 나라에도 작고 거룩한 소리가 있습니다. 이 나라 곳곳에서 작고 거룩한 소리를 내며 조용히 살아가는 아리땁고 예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름 하나 나지 않고, 힘 하나 없으며, 돈 한 푼 없는 아리땁고 예쁜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그렇지만 한국땅에서 한국터에 걸맞게 작고 거룩한 소리를 내는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은 썩 드뭅니다. 지식인은 지식인끼리 사귑니다. 대학생은 대학생끼리 어울립니다. 도시내기는 도시내기끼리 만납니다. 기자는 취재원을 찾아다닐 뿐, 사람을 부대끼지 못합니다. 공무원은 민원인을 대접할 뿐, 사람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칠 뿐,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나부터 작은 사람이고 작은 삶입니다. 나 스스로 작은 목소리이면서 작은 꿈입니다. 나와 매한가지로 작은 이웃이고 작은 동무요 작은 살붙이입니다. 작은 목숨이자 작은 발걸음이자 작은 살림살이입니다.


.. 자본주의는 본래 즐거움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 알도 레오폴드, 게리 스나이더, 로빈슨 제퍼스, 에드워드 윌슨 같은 철학자나 시인, 생태주의자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런 성스러움을 다시 일깨우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의 글을 읽지 않지요 … 시가 산문이나 다른 유의 문학과 다른 점은 말이 우선이라는 사실이에요. 고립되고 고답적인 문자적인 고급문화가 되는 건 시의 목적이 아니지요. 자기만의 작고 외로운 방안에 고립되기보다는 우리를 한데 묶어 주는 게 시지요 ..  (100, 172, 213쪽)


 《작고 위대한 소리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작고 위대한 소리들》은 오롯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본주의 나라 사람들이 너른 생각을 펼치는 《작고 위대한 소리들》은 자본주의야말로 사람맛과 사람내음과 사람결이 조금도 없는 무시무시한 얼거리라고 이야기합니다. 맨앞에서 자본주의를 온누리에 퍼뜨리는 미국땅 사람들인데, 이 책에 나오는 열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자본주의는 생각조차 않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들 열두 사람이 생각하는 삶이란 ‘나와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사랑하는 삶’일 뿐입니다.

 손을 놀리는 삶을 사랑합니다.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도움받는 삶을 사랑합니다. 손으로 서로를 얼싸안거나 부둥켜안는 삶을 사랑합니다.

 따순 손길 따순 손마디 따순 손아귀 따순 손끝입니다. 투박하면서 수수한 손입니다. 거칠면서 조촐한 손입니다. 고요하면서 끈기있는 손입니다. 차분하면서 정갈한 손입니다. 단단하면서 씩씩한 손입니다.


.. 안다는 게 뭔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안다는 게 어떤 대상을 일방적이고 지적으로 마스터하는 행위라면, 대상을 기계처럼 낱낱이 분해하는 것이라면 그런 과학자들처럼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과 같이 살면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드디어 그녀를 철저히 다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무슨 뜻이 될까요? ..  (254쪽)


 착한 마음으로 시골을 사랑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착한 마음으로 시골에서 살아가면 그지없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북중미 토박이는 하나같이 시골사람이었지 도시사람이지 않았습니다. 아름답게 살다가 죽었다는 니어링 부부는 시골사람으로 삶을 꾸렸지 도시사람으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작고 위대한 소리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시골사람다이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일거리를 붙잡아도 ‘시골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동네사람’ 매무새로 일을 합니다.

 시골에서 흙과 하늘과 물과 햇볕과 바람과 나무를 사랑하는 몸가짐을 알뜰히 건사하면서 도시에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저 도시내기로서 도시사람으로 지낸다면 아름답지 못합니다. 착한 마음씨를 곱게 다스리면서 도시에서 지낼 때에 아리땁습니다. 그냥저냥 도시내기인 굴레에서 쳇바퀴를 돌듯 돈벌이만 한다면 너무 슬프며 안타깝습니다.

 사랑해야 할 내 삶입니다. 아껴야 할 내 목숨입니다. 돌봐야 할 내 터전입니다.

 착한 내 삶을 사랑하고, 참다운 내 목숨을 아끼며, 고운 내 터전을 돌봐야 합니다.

 커다란 소리에 흠칫 놀라 쳐다볼 수 있겠으나, 커다란 소리가 제아무리 뻥뻥 터져나오더라도 자그마한 소리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대단하다 싶은 소리에 귀가 쫑긋할 수 있을 테지만, 대단하다 싶은 소리가 시끌벅적 춤추더라도 수수하다 싶은 소리를 아끼는 삶으로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가녀린 이웃을 돌보고, 애틋한 살붙이를 보듬으며, 싱그러운 내 몸뚱이를 쓰다듬으면 좋겠습니다. (4343.12.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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