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과 글쓰기


 헌책방에서 책을 살핍니다. 손님이 거의 없는 헌책방 골마루를 바지런히 오가면서 책을 돌아봅니다. 이 책도 반갑고 저 책도 고맙습니다. 눈이 맑게 트이고 넋이 밝게 열립니다. 왜 이 나라 많은 사람들은 이 애틋한 헌책방 헌책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 따위는 할 겨를이 없습니다. 내 눈앞에 놓인 이 살가운 헌책을 하나하나 쓰다듬지 못하니 서운하고 아쉬우며 안타깝습니다. 누리려 하지 못하는 사람한테 억지로 누리라 할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나부터 즐거이 누리면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대로 책방마실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대로 책방으로 나들이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그때그때 제 삶에 걸맞는 책을 바라거나 찾습니다. 어릴 적부터 익히 가까이하던 책을 나이든 뒤에도 익히 가까이합니다.

 도서관에서 책읽기를 즐기며 컸으면 어른이 되어도 도서관을 사랑합니다. 여느 새책방에서 책읽기를 맛보며 자랐으면 어른이 된 뒤에도 여느 새책방을 찾아다닙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새삼스레 마주하며 살았으면 어린이일 때뿐 아니라 어른일 때에도 헌책방 헌책을 알아보거나 꿰뚫 수 있습니다.

 태어나기를 도시에서 태어날 뿐더러, 자라기를 도시에서 자라는 데다가, 어른이 되어 큰학교나 회사를 다닐 때에도 도시에서 잠자고 먹고 마시며 다니니까, 도시 삶에 익숙합니다. 웬만한 도시사람들은 시골살이를 모를 뿐더러 잘못 알거나 엉터리로 알거나 엉뚱하게 여기곤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헌책방 헌책을 제대로 톺아보지 못하는 대목을 섣불리 나무라거나 괜히 안쓰러이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헌책방마실을 했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고른 헌책들을 가방에 꾸리거나 끈으로 묶어 시골집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택배로 맡겨야 합니다. 큼직한 상자 하나에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나옵니다. 책값을 치르고 택배값을 냅니다. 괜시리 뿌듯합니다. 어쩐지 홀가분합니다. 배부르고 든든합니다.

 누군가는 값싸게 사들여서 좋다고 합니다. 아마 값싸게 사들여 좋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값싸게 사들여 좋다면 고물상이나 폐지상에서 짐차로 잔뜩 들여놓을 노릇입니다. 값싸게 사들여 좋은 책이라면, 언제나 잔뜩 사들일 텐데, 언제나 잔뜩 사들인 책을 집에 어떻게 건사하려나요. 책은 값싸게 사들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추억을 먹는다고 합니다. 아마 추억, 그러니까 옛생각을 떠올릴 만합니다. 그렇지만 옛생각이란 무엇이려나요. 지난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책을 읽었는가요.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오늘 읽을 책을 살 뿐입니다. 나는 오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오늘 손에 쥘 책을 장만할 뿐입니다. 판이 끊어진 책이건 거의 안 팔리거나 사랑받지 못한 책이건 무슨 대수랍니까. 내 가슴을 후벼파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책이면 다 좋습니다.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사랑스러운 넋을 실은 책이면 모두 반갑습니다. 내 가슴을 건드리지 못하는 책일 때에는 베스트셀러이건 스테디셀러이건 부질없습니다. 신문기자들이 신문 한 쪽에 대문짝만하게 소개글을 적어 주었다 해서 이런 책을 굳이 나까지 읽을 까닭이 없어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북돋우고자 책을 읽습니다. 나는 내 삶을 즐기고 돌보며 살찌우고자 책을 가까이합니다. 나는 내 삶을 믿고 살피며 좋아하니까 책을 마주합니다.

 헌책방은 사랑이고 헌책은 삶이며 헌책방 일꾼은 사람입니다. 사랑과 삶과 사람을 한 자리에서 곱게 맞아들이는 마실이 헌책방마실입니다. 고마우면서 반가운 책을 언제나 만나니까 나부터 고마우면서 반가운 넋을 담아 글 한 줄 끄적입니다.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운 책을 늘 얻으니까 나 스스로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운 얼을 실어 글조각 매만진답시고 바둥거립니다.

 돈 천 원으로 아주 눅은 책 하나 헌책방에서 장만하여 선물합니다. 때로는 몇 만 원에 이르는 책 하나 헌책방에서 사들여 선물합니다. 선물받은 분들은 천 원짜리 헌책이건 십만 원짜리 헌책이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돈값이 아닌 책을 받기 때문입니다. 낡거나 헐거나 반지르르하거나 번쩍이거나 하는 물건이 아닌 책에 깃든 이야기를 받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어릴 적부터 헌책방을 함께 다닐 수 있어 기쁩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어린 날부터 헌책방을 함께 다니며 헌책방 일꾼한테서 사랑을 받고 헌책방 다른 책손한테서 귀여움을 받으니 참으로 즐겁습니다.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헌책방마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대목 하나 고맙습니다. 김치를 담글 줄 몰라 김치 잘 먹는 아이한테 김치를 제대로 못 먹이는 바람에 할머니 두 분한테서 김치를 얻어 겨우 먹이지만, 자동차 굴릴 돈도 없고 자동차 굴릴 면허증조차 없으니 노상 아이가 두 다리 아프도록 걸리면서 마실을 하지만, 은행계좌는 텅텅 비어 얼음과자이든 까까이든 무어든 마땅히 사 주지 못할 뿐더러 시골집 썰렁한 방을 조금이나마 따숩게 덥히지 못하며 옷을 여러 벌 껴입히며 보내지만, 이렇게 엉터리 어버이이지만, 다문 한 가지 헌책방마실 하나는 살짝이나마 맛보도록 해 줄 수 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한테도 고맙고 땅과 바다에 계신 아버지한테도 고맙습니다. 누구보다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 주는 옆지기한테 고맙습니다. (4343.12.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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