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그스름 감알


 발그스름 감을 열다섯 알 얻다. 감알은 발그스름한 빛깔인데 열다섯 알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똑같은 빛깔인 감알은 하나도 없다. 가을녘 감나무를 올려다보면 감잎 가운데 같은 빛깔인 잎새는 하나도 없다. 감잎이든 감알이든 저마다 다 다른 크기요 모양이요 빛깔이다. 더욱이, 이 발그스름 감알을 살짝 깨물어 먹노라면 감알마다 맛이나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내 삶으로 스며드는 책을 돌아볼 때에도 똑같은 줄거리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글넋 똑같은 흐름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다 다른 삶 다 다른 넋으로 다 다른 아름다움을 이루어 낸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알을 따서 맛을 볼 때하고, 일찌감치 따 놓고 저온창고에서 삭여 낸 예쁘장하고 거의 똑같이 생긴 감알을 저잣거리에서 사들여 맛을 볼 때에는 몹시 다르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감알, 그러니까 저온창고에서 삭여 낸 감알은 어느 감을 맛보든 매한가지이다. 이 감알도 감나무에서 땄고, 이 감알을 딴 감나무는 땅에 뿌리박으면서 햇살과 흙과 물을 받아먹었을 텐데, 이 감알을 먹으면서 자연을 먹는다고 느끼지 못한다. 내 삶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책을 헤아릴 때에는 으레 어슷비슷하다고 느낀다. 한결같이 얕으며 돈내음이 물씬 난다. 나로서는 얕은 책 돈내음 책 어설픈 글치레 책은 읽을 수 없다. 이런 책까지 읽느라 내 고운 삶을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감나무에서 저절로 발갛게 익는 감을 그때그때 따서 먹을 때에는 감나무한테 고맙다는 말을 코앞에서 건네며 고개를 숙인다. 가지를 붙잡고 감알을 따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 마디씩 꼬박꼬박 한다. 나한테 고맙게 감알 하나 베풀어 주는 감나무한테 풀약을 친다거나 비료를 준다거나 항생제를 먹인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올해부터 만들고 있는 거름통에서 이듬해부터는 거름을 퍼서 줄 수 있겠지. 올해 감알 고맙게 얻어 먹었으니, 우리 식구 똥오줌을 잘 삭여서 감나무하고 흙한테 돌려주어야지. 내 삶으로 스며드는 책을 장만할 때에는 책값을 오롯이 치른다. 새책은 새책대로 제값을 꼬박꼬박 낸다. 헌책은 헌책대로 헌책방 일꾼이 흘린 땀방울에 값할 수 있도록 주머니를 턴다. 내 몸 살찌우는 밥이 고맙고, 내 마음 북돋우는 책이 반갑다. (4343.10.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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