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웅진 지식그림책 20
윤여림 지음, 정유정 그림, 이은주 감수, 조은화 꾸밈 / 웅진주니어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식 키우는 책과 삶을 살리는 책
 [책읽기 삶읽기 19] 윤여림+정유정,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아이하고 날마다 갖가지 그림책을 읽는다. 아이한테 읽히려고 하다가 애 아빠 혼자서 한참 들여다보는 그림책이 있어 아이가 아빠 팔을 잡아당기는 때가 있고, 애 아빠는 좋다고 아이한테 읽히는데 아이는 다른 놀이를 한다며 딴전을 피울 때가 있다. 틀림없이 아이도 좋아하는 그림책이지만 이날 따라 딴짓을 하고파 본 척 만 척한다면 괜찮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데 아이는 지루해 하고 애 아빠도 따분해 하면 큰일이다. 이때에는 이 그림책에 담긴 그림이 아무리 예쁘장하다 해도 달갑지 않다. 이렇다면 이 그림책에 깃든 줄거리가 아무리 알차다 해도 반갑지 않다.

 그림책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를 읽다. 이 그림책에는 ‘지식 그림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런 이름은 보지 않고 골랐다. 우리 나라에서도 창작 그림책이 제법 나오기는 하지만, 우리 둘레 삶터를 찬찬히 헤아리며 알뜰히 담아내는 그림책은 아직 얼마 못 본다. 이런 가운데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라는 작품은 책이름이나 짜임새에서 무언가 수수하고 맛깔스러운 이야기를 담지 않았겠느냐 생각했다.

 책을 펼치면 아이 얼굴을 가득 덮을 만큼 커다란 나뭇잎에 구멍 둘 송송 내어 탈처럼 쓰는 모습이 하나 있다. 나뭇잎처럼 생긴 종이를 벗기면 아이 얼굴이 드러나고, 다시 나뭇잎처럼 생긴 종이를 책에 붙이면 ‘나뭇잎 탈’이 된다. 아이는 이 책을 보는 내내 이 대목 하나에서만 만지작거리며 “언니 얼굴이네.” 하는 말을 할 뿐, 다른 대목에서는 싱숭생숭. 아이가 하도 재미없어 하기에 ‘공원길을 거닐며 나뭇잎을 줍는 아이들’이 나오는 그림에서 겨우 거미 몇 마리를 찾아내어 “여기 거미 있네.” 하고 가리킨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집에서 거미이며 개미이며 벌레이며 흔히 보니까, 아이는 거미나 개미나 벌레가 나오는 그림을 금세 알아채며 좋아하곤 한다. 그런데 몇 번씩 “여기 거미 있어. 여기 거미 있잖아.” 하고 말해 주어도 못 알아본다. 아예 알아볼 마음이 없는가.

 아이는 아빠랑 그림책 읽기를 그만둔다. 함께 보자는 그림책이 지루하다고 느낀 탓이다. 아빠는 그림책을 마저 펼쳐 살핀다. 왜 이렇게 아이가 지루하다고 느껴 하는가를 생각한다. 그러고는 다른 그림책을 하나 꺼내어 읽어 본다. 아, 금세 느낌이 온다.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는 이 그림책에 붙은 작은 이름 ‘지식 그림책’ 알맹이에 알뜰할 뿐, 정작 그림책이 할 몫을 못한다. 더 생각해 보면 참다운 지식 그림책이라 말하기도 어려우나, 어찌 되었든 지식을 다루는 그림책 자리에 머물 뿐,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책이라든지 삶을 밝히는 그림책으로 거듭나지 못한다.

 그림책을 그리는 사람하고 그림책에 글을 쓰는 사랑이랑 그림책을 엮는 사람 모두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어떤 그림책이든 하나같이 ‘지식 그림책’이다. 지식을 다루지 않는 그림책이란 없다. 스무 해쯤 앞서부터 ‘철학 동화’라는 어린이책이 널리 팔리곤 하는데, 어떠한 동화이든 철학이 안 담긴 동화란 없다. 모든 동화에는 철학, 우리 말로 풀면 ‘생각’을 담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화이든 가르침을 베푼다. 한자말로 하자면 ‘교훈’이 없는 동화란 없으며, 어른문학도 매한가지이다. 과학 동화나 과학 그림책은 좀 다를는지 모르나, 참다이 빚은 글책과 그림책일 때에는 굳이 ‘과학’이란 이름을 내어 붙이지 않으면서 몹시 아름다운 과학 동화요 과학 그림책이요 된다. 이를테면, 책이름은 참 잘못 붙였는데, 일본사람이 빚은 《도둑고양이 연구》(파랑새,2008)라는 그림책이 있다. 이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다. ‘과학’이란 머리말을 달지 않는다. 이 그림책은 ‘도둑고양이’ 아닌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야 옳으나, 아무튼 이 그림책에서 살피어 담아낸 골목고양이 삶자락은 온통 과학이라 할 만하다. 그린이는 과학하는 사람답게 골목고양이 삶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펼친다.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는 딱히 잘못 그렸다고 하는 대목은 없다. 그러나 살뜰히 그렸다고 하는 대목 또한 없다. 틀리게 그렸다고 하는 대목이란 없다. 그렇지만 살가이 그렸다고 할 만한 대목 또한 없다.

 숲에 들어가 보자. 수목원이나 동네 공원에 ‘사람이 억지로 심어 가꾸는’ 나무숲이 아닌, 나무와 풀과 짐승이 자연스러이 어우러져 있는 ‘사람이 오가는 길이 없는’ 그냥 숲에 들어가 보자. 억지로 키우는 숲이 아닌 곳에 들어가 보면 어떠한 나뭇잎을 만나는지 느껴 보자. 억지로 키우는 숲일지라도 얼마나 많은 나뭇잎이 있는지 헤아려 보자. 사람들이 으레 ‘참나무’라 하는 나무는 가짓수가 얼마나 많은지 곰곰이 살피고, 같은 소나무라 하더라도 나뭇잎이 얼마나 다른지를 바라보며, 감나무 한 그루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깔려 있는 가랑잎 모양이 얼마나 다른가를 느끼자. 나뭇잎 이야기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니까, 사람하고 같이 살아 주고 있는 고마우며 사랑스러운 나무이니까, 나무 한 그루 튼튼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싱그러운 나뭇잎 하나이니까, 이러한 목숨붙이와 자연을 꾸밈없이 가슴으로 받아들이자.

 그러고 보면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같은 그림책은 ‘지식 그림책’이라는 이름이 아닌 ‘자연 그림책’ 같은 이름이 붙어야 한다. 처음부터 이와 같은 이름을 붙이려 하면서 책을 엮었어야 조금이나마 살가우며 아리따운 작품으로 거듭나지 않았겠느냐 생각한다.

 온갖 나무가 골고루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도시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 뿐 아니라,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은 도시에서 바글바글거리는 틈바구니에 찡기어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아이답게 살아가지 못한다. 오늘날 아이들은 제 또래 동무나 손위 언니 오빠 형 손아래 동생하고 신나게 부대끼며 뛰어놀지 못한다.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으면 안 되지만, 불을 땔 삭정이를 줍고 장작을 패거나 나무 열매를 따는 일을 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 아이들은 저잣거리조차 잘 가지 않고 마트에만 갈 뿐이다. 감이 감나무에서 열리는지, 배가 배나무에서 열리는지, 포도가 포도나무에서 열리는지를 모른다. 오늘날 과일밭은 얼마나 과일나무를 모질게 다루는지를 모르고, 옹글게 자라는 능금나무 한 그루를 보지 못한다. 복숭아나무를 모르고 살구나무를 모르면서 복숭아며 살구며 오얏이며 먹는다. 이러한 열매들을 오로지 ‘값 얼마짜리’로만 여긴다.

 어른이고 아이이고 ‘배추 한 포기 얼마, 배 한 알 얼마’ 하는 지식으로만, 숫자로만, 틀에 박힌 도시내기 쳇바퀴로만 바라본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나무 한 그루 사랑스레 얼싸안거나 쓰다듬지 못한다. 이리하여 그림책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는 그린이나 글쓴이나 엮은이나 ‘지식 그림책’ 울타리에서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겠구나 싶다. 이 책을 장만하여 읽힐 어버이와 어린이 또한 이 그림책이 한결 참답고 착하며 곱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 줄을 못 깨달을밖에 없다.

 가장 좋은 지식 그림책은 멧자락과 들판에 있다. 멧기슭이 바로 좋은 그림책이고, 너른 들판이 빛나는 그림책이다. 파란 바다와 하늘이 훌륭한 그림책이며, 멧새와 멧짐승이 고마운 그림책이다. (4343.10.23.흙.ㅎㄲㅅㄱ)


―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윤여림 글,정유정 그림,웅진주니어 펴냄,2008.10.20./9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