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스페인으로 마실을 간다는 형이 인천에 찾아왔다. 이제 모레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단다. 꽤 오래 마실을 한다는 형인데 잠깐 있으라 하더니 은행에 들러 맞돈 백만 원을 뽑아서 나한테 건넨다. 다음달에 집을 옮긴다는 나한테 돈이 있느냐고 묻더니 이렇게 곧바로 보태어 준다. 집과 도서관 달삯은 벌써 몇 달 앞서부터 돈 대기에 빠듯해서 죽을 노릇이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는 돈을 빌려주는 데도 없으나 돈을 빌려서 쓸 마음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어찌저찌 고마운 손길을 받으며 버티는 살림살이였기에 살림집을 빼면 보증금 삼백만 원으로 짐차 부르고 시골집 보일러 기름을 넣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코앞에 닥친 이달치 달삯이 걱정되었는데, 용케 형한테서 도움을 받아 크게 한숨을 돌린다. 밤나절, 졸려 하는 아이 이를 닦고 손발을 씻긴 다음 등에 업고 노래를 불러 준다. 업힌 아이 손에서 힘이 다 풀리고 고개가 내 등에 푹 박힐 무렵 천천히 바닥에 아이를 뉘인다. 이십 분을 아이 곁에서 가만히 기다린 다음 기저귀를 채운다. 비로소 느긋하게 셈틀을 켠다. 그렇지만 셈틀을 켰어도 글을 쓸 기운은 없다. 하루 내내 홀로 아이를 돌보느라, 더욱이 어제그제오늘까지 이불 세 채를 내리 빨래하느라 해롱해롱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인터넷으로는 책을 사지 않던 내가 두 군데 오래도록 다니고 있던 헌책방 누리집으로 들어간 다음 책을 십만 원어치나 고른다. 두 군데 헌책방은 처음부터 누리집을 꾸리던 데가 아닌데, 이제는 제법 크게 누리집을 꾸리고 있으며, 나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매장을 찾아가서 책을 살 뿐, 오늘처럼 누리집에서 목록을 들여다보며 책을 고르는 일은 없었다. 형은 틀림없이 집 옮기는 데에 보태고 아이한테 맛난 밥 사 주라는 뜻으로 돈 백만 원을 주었는데 이 가운데 십만 원을 책값으로 덜컥 쓰고 만다. 책값을 다 치러 놓고 괜히 아이한테 미안하고 형한테 쑥스럽다. 돈이 한 푼이라도 생기면 무엇보다 책을 사들이는 데에 쓰는 버릇은 참 어찌할 길이 없다. 굶어도 책이고 불러도 책인 내 삶은 늘 이렇게 돌아간다. 어쩌면 형은 내가 이렇게 책값으로 돈을 쓸 줄 알았을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책값으로 십만 원뿐 아니라 다시금 십만 원을 더 쓸는지 모르는데, 여기에서 즐겁게 멈추어야겠지. 아, 나한테는 파노라마 후지6×17은 그예 꿈으로 그치지 않으랴 싶다. 나 스스로 부끄럽고 옆지기와 아이한테 미안하며 형하고 아버지 어머니한테 들 얼굴이 없다. 노상 하듯 두 손 네 손가락으로 사진틀을 만들어 마음껏 찍을 수 있는 사진만 찍어야겠다. (4343.5.29.흙.ㅎㄲㅅㄱ)
 

.. 형한테 미안하고 고맙기에 글 하나를 끄적이는데, 글을 끄적이는 내내 괜히 슬프면서 홀가분하다. 아무래도 후지617을 손에 쥘 날을 맞이할 수 없으리라 느끼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생각으로나마 이 사진기를 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끄적거리면서 마음을 달랠 수 있다. 가장 싼 파노라마사진기인 후지617이지만, 김영갑 님이 돌아가시면서 얼결에 이 값싼 보급형 파노라마가 지나치게 뻥튀기 값이 붙으며 비싸구려가 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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