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수의사의 자연일기
다케타즈 미노루 지음, 김창원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11 ― 내 가슴속에서 살고 있는 자연 찾기
 : 다케타즈 미노루, 《숲속 수의사의 자연일기》



- 책이름 : 숲속 수의사의 자연일기
- 글ㆍ사진 : 다케타즈 미노루
- 옮긴이 : 김창원
- 펴낸곳 : 진선books (2008.1.28.)
- 책값 : 13800원



 (1) 학교와 자연


 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 학교에서 내어주는 숙제 가운데 가장 하기 싫은 숙제는 ‘우리 동네 천연기념물 알아오기’나 ‘우리 동네 국보 알아오기’ 따위였습니다. 서울만 하더라도 천연기념물로 삼는 나무가 있으며 국보로 삼는 보배가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 땅 어느 곳에 가도 천연기념물이며 국보이며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에서는 천연기념물도 국보도 만날 수 없었을 뿐더러, 보물로 치는 문화재를 만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아니, 천연기념물을 떠나 그 흔한 여느 새를 생각하기란 몹시 어려웠어요.

 나중에 커서 생각해 보면, 날마다 보던 갈매기를 애틋하게 여길 수 있고, 낚시하러 갯가에 가서 잡던 망둥이라든지, 동네에 있던 조그마한 논에서 잡던 미꾸라지를 살가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자연이나 사회 과목에서는 ‘우리 둘레 흔한 목숨붙이’는 그리 값할 만하지 않은 듯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개구리나 두꺼비를 사랑하는 일은 ‘자연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고 가르쳤고, 두루미나 오색딱따구리나 미선나무쯤 들먹여야 무언가 아는 셈이고 자연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듯 이야기했습니다.


.. 라디오에서는 저기압이 북쪽 해상을 통과한다고 알리고 있었다. 내일은 틀림없이 남풍이 불 것이다. 유빙을 데려가기 위해. “훗카이도 사람들은 보물섬에서 살고 있군.”  친구는 이 말을 남기고 도쿄로 돌아갔다 … 그 당시는 강물이 깨끗하다 못해 아름다웠다. 아무도 강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다. 하물며 강에 오줌을 누는 천벌 받을 짓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일대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그맘때면 자연이 베풀어 주는 혜택을 그 강을 통해 받았기 때문이다 ..  (14, 105쪽)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또 고등학생이 될 무렵만 하여도, 인천에서 안개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툭하면 안개가 짙게 끼어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을 애먹었습니다. 그래 보았자 아홉 시가 넘어가고 열 시가 가까우면 걷혔는데, 이 짙은 안개가 오래오래 드리우면서 ‘우리도 학교를 좀 쉬어 봤으면’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코앞도 헤아릴 수 없도록 드리우던 안개가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 으레 나타난다고 말하던 교사란 없었고,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이라고 딱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마땅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인천사람으로서 물때를 모른다면 바보이고 바다 날씨를 모르면 멍텅구리였을 테니까요. 아주 꼬맹이가 아니고서는 다 알아야 한다고 여긴 바다 날씨였으니 굳이 이야기할 까닭이 없었고, 안개이든 뭐든 철 따라 찾아오는 모습이었을 뿐입니다. 뭉게구름이나 소나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지개를 대단히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보니까요.

 집집마다 온갖 꽃을 어여쁘게 키우기는 했으나 이런 꽃은 ‘돈으로 따질 값나가는 천연기념물에 들지 않으’니 푸대접을 해도 괜찮은 듯 가르친 학교라고 할까요. 아니, 처음부터 아예 생각할 구석이 없는 듯 우리 매무새를 길들인 학교라고 할까요.

 국민학교 3ㆍ4ㆍ5학년 때에는 방학숙제로 식물채집을 즐겨했는데, 식물채집이건 곤충채집이건 ‘흔한 풀꽃과 벌레’를 거두어 오면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해마다 ‘흔한 풀꽃’을 스무 가지에서 서른 가지 즈음 거두면서 숙제로 내었고, 다른 동무 가운데에는 흔한 풀꽃조차 대여섯 가지를 거두어 온 녀석이 없던 탓인지, 저는 늘 점수를 잘 받았습니다. 하기는. 바다로 흘러가는 개천 옆 아파트 꽃밭에서 자라던 들딸기 한 포기도 거두었고, 아빠 엄마랑 설악산 나들이를 했을 때에도 두어 가지 풀을 캐 왔고, 수봉공원과 자유공원 마실을 하면서 이 풀 저 풀 캐 오며 ‘이름 모르는 풀’이라고 척 붙여놓곤 했으니까요.


.. 말은 트랙터와 달라서 ‘따 따 따 따’하는 요란한 소리 따위를 내지 않는다. 기껏 나는 소리라야 목을 돌릴 때마다 목에 걸린 방울이 ‘땡강 땡강’ 하고 울리는 정도다. 그리고 언땅이 녹는 것이 밭의 지형에 따라 이르거나 늦어져 밭갈이가 일제히 시작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말은 경유만 넣어 주면 며칠이고 움직일 수 있는 기계와는 달라서 전날 일이 힘들었다 싶으면 쉬게 해야 했고, 어떤 때는 주인이 전날 밤 약주를 많이 들었다고 해서 오후 늦게 밭에 나오는 그런 식이었다. 여하튼 모든 것이 느긋하고 한가로웠다 … 그리고 얼레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길래 “얼레지 알뿌리를 갈아서 그것으로 경단을 만들면 어떤 맛일까요?” 하고 말을 꺼냈더니 모두들 나를 흘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때 나는 맥주 기운이 좀 돌아서 별 생각 없이 “좋아하는 것은 먹어야죠. 먹을수록 더 좋아질 테니까요.” 했더니, 그중 한 사람이 “그럼 선생님, 여우 고기 맛은 괜찮아요?”라고 해서 내가 한방 얻어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  (30, 37쪽)


 요즈음도 학교에서 식물채집이나 곤충채집 숙제를 내어주는지 궁금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이제는 식물채집이든 곤충채집이든 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사람 아닌 목숨이 홀가분하게 숨쉬고 살아갈 터전이란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니까요. 아니, 우리 스스로 사람 아닌 목숨은 살아갈 수 없게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온땅을 뒤덮고 있으니까요. 아니, 우리들은 이웃사람조차 살아갈 수 없게끔 비싼집을 새로 짓고 값싼집은 허물면서 온통 아파트나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까요. 돈이 없으면 사람으로 치지 않고, 돈 되는 일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사람값을 못하는 듯 따돌리니까요.


.. 지키는 농부는 긴 장대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어 댈 뿐, 소리도 크게 지르지 않아서 옆에서 보면 쫓는다기보다는 함께 놀고 있는 것 같은 느긋한 분위기였다. 농가의 뜰은 넓다. 저쪽에서 한 무리의 다람쥐들이 우르르 달려와 볼주머니에 밀을 채우고 있으면 농부는 달아나는 시간을 주려는 듯이 천천히 다가가서 장대를 흔든다. 그러면 또 다른 놈이 저쪽에 와서 붙는다. 참새들은 흔들거리는 장대가 아예 보이지 않는 듯 먹기에 바쁘다. 아무튼 적은 많고 끈질기다. 한 농가 주인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하루에 한 가마니는 각오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그들도 겨울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하고 덧붙였다 ..  (122쪽)


 그러고 보면 학교는 자연하고 울타리를 쌓습니다. 학교부터 자연하고 동떨어져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자연을 벗삼는 일이란 없습니다. 봄가을에 맞추어 자연 터전으로 나들이를 간다고 하여도 아이들은 먹고 쓰고 버리는 데에만 익숙하지, 자연을 아끼고 돌보면서 너른 품을 고이 껴안고자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는 교사부터 자연을 넉넉히 껴안지 않기도 하고요.

 입으로는 물질만능주의 서양이 ‘동양사람들 마음밭 깊은 뜻 앞에 고개를 숙인다’고도 외지만, 정작 우리 스스로 우리 넋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않고 우리 얼이 어떠한지 곱씹지 않습니다. 되레 서양보다 깊디깊이 물질만능주의에 빠지며, 여기에 돈과 기계와 전쟁에 매입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길이 아닌 이웃을 밟고 올라서는 길을 걷습니다.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사랑이 아닌 서로를 등처먹는 경쟁과 장사속이 판치도록 하고, 서로를 지키고 다독이는 믿음이 아닌 서로를 괴롭히고 편가르는 학벌과 연고제와 조직을 키웁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든 중학교를 다니든 고등학교를 다니든 나아질 낌새가 없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든 대학원을 다니든 매한가지입니다.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왔어도 지식조각은 많이 갖추지, 마음바탕이 깊어지거나 넓어지지 않아요.


.. 백조나 쇠기러기의 대량 폐사 이전에도 물새들의 죽음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일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은 훗카이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사냥터에서도 똑같지 않았을까? 이름 없는 새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두들 무관심했다. 백조와 쇠기러기에 이어서 참수리, 흰꼬리수리 같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새의 희생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  (240∼241쪽)


 우리 교실이 그렇잖습니까. 우리 교실 어디에도 자연이 숨쉴 수 없습니다. 우리 교실 어느 구석에 꽃그릇 하나 놓여 있는가요. 꽃그릇 하나 놓여 있다 한들 날마다 사랑하고 아끼는 꽃그릇입니까, 그저 모양새로 갖다 놓은 꽃그릇입니까. 밝은 한낮에도 전기불을 켜야 하는 교실 아닙니까. 밝은 한낮에 햇살을 듬뿍 쬐면서 신나게 뒹굴고 땀흘릴 수 있는 학교는 어디에 있습니까. 새벽별을 보고 찾아와 밤별을 보며 돌아가는 학교는 언제쯤 몰아낼 수 있습니까. 아니, 이런 입시지옥 거짓 배움터를 우리 삶터에서 쫓아낼 생각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습니까.


 (2) 집과 자연


 예전에 출판사에서 일하던 때, 일터 사장님은 저를 일본에 한 번 중국에 두 번 보내 주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나라밖 구경을 해 보았는데, 사진과 그림으로만 보던 나라밖 모습과 두 눈으로 들여다보며 몸으로 부대끼는 나라밖 모습은 사뭇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어느 도심지가 되든 건물만 우죽우죽 올라선 곳은 메마르기 그지없습니다. 도심지에서는 모두 바빠맞으며 차갑고 매몰찹니다. 그런데 그 도심지에서도 살짝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면 모두 느긋하며 따뜻하고 넉넉합니다.

 일본 간다 헌책방거리도 좋았지만, 헌책방거리가 아닌 여느 사람들 삶터가 깃든 골목 안쪽 또한 참으로 좋았습니다. 저는 일부러 골목 안쪽으로 ‘길을 헤매고 싶은 사람’처럼 돌아다녔는데, 고즈넉한 길에 차는 한 대도 없이 걷는 내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집집마다 문간 둘레에 마련해 놓은 꽃그릇 냄새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라, 북경이든 연길시이든 도심지하고 도심지에서 벗어난 곳은 크게 달랐어요.


.. 아이누족은 복수초꽃이 피면 한 해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해의 첫 달은 4월이 되는 셈이다 … 복수초는 북쪽 지방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그래서 이 꽃을 보고 한 해가 시작한다고 생각한 아이누족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 하루는 하날다람쥐에게 줄 먹이를 얻으러 나갔다. 이 시기에 야생 하늘다람쥐는 버드나무의 꽃눈이나 자작나무의 꽃눈, 낙엽송이나 분비나무의 겨울눈을 즐겨 먹는다 … 연령초는 5월이면 잎이 시들고 열매를 맺는다. 달고 맛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매우 좋아하는데 청설모도 먹는 것 같다 ..  (18, 31, 54쪽)


 저는 서울내기가 아니고, 서울이라는 곳은 1994년에 처음 밟았으며, 1995년부터 2003년 가을까지 살았습니다. 이때 서울에서 살며 날마다 두어 곳씩 헌책방마실을 했고, 헌책방마실은 거의 언제나 두 다리로 걸어서 했습니다. 하루에 예닐곱 시간이나 여덟 시간 남짓도 걸어다녔습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곧잘 걸어다녔고 한강다리도 숱하게 두 다리로 넘었습니다. 헌책방은 큰길가나 번화가에 없으니, 언덕배기를 따라 골목길을 수없이 누볐습니다. 2000년대를 넘어서고 2010년대에 가까워질수록 서울은 달동네 집자리가 사라지고 아파트가 부쩍 늘어나는데, 이러는 가운데 헌책방도 숫자가 많이 줄었습니다. 헌책방을 비롯해 동네 작은 새책방도 많이 줄었고요. 학교 앞 문방구도 한두 군데 빼놓고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구멍가게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 되어 갑니다.

 작은 집을 허물고 커다란 집만 세우기 때문인데, 작은 집은 돈이 안 되고 커다란 집은 돈이 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작은 집에서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오순도순 지내던 맛과 멋을 우리 스스로 내버리고, 커다란 집에서 방마다 따로따로 처박혀 따로따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켜고 제 꿈나라로 빠져드는 놀이에 젖어들고 싶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꾸준히 땀흘려 번 돈으로 이웃돕기나 이웃사랑을 펼치기보다는, 내 집을 더 키우고 내 차를 더 키우며 내 씀씀이를 더 헤프게 하는 데에 빠지는 버릇에 젖어들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 우리들은 계절을 잃고 말았다. 봄의 바다가 잊혀져 가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얼마 안 가서 항구를 떠나는 고기잡이배를 한 척도 못 보는데도 생선은 여전히 가게에 쌓이는 날이 올지 모른다. 송어나 연어란 원래 토막난 몸으로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 도망갈 데가 얼마든지 있는 산속의 초지는 평소 토끼에게 안전하고 마음 놓이는 장소지만, 사람들이 그곳의 목초를 베고 거둬들이는 7월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토끼들의 낙원은 하룻밤 사이에 전쟁터로 바뀐다 ..  (48, 85쪽)


 다른 누구보다 우리 아버지가 이러합니다. 이런 아버지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고 느끼지만, 아버지는 저 같은 아들이 안타깝다고 느끼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들 된 저는 알맞게 벌고 알맞게 쓰며 알맞게 나누면 즐겁다고 느끼지만, 아버지 된 분은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며 더 많이 누리면 좋다고 느낍니다. 더 많이 배우면 더 좋고, 자가용으로 더 빨리 달리면 더 좋으며, 더 많이 번 돈으로 더 돋보이는 아파트에 살면 더 좋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 집에도 꽃그릇은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 아파트에도 꽃그릇은 많습니다. 밖에서 보면 그예 시멘트덩어리이지만, 이 안쪽에는 온갖 꽃그릇이 그득그득 채워져 있다고 할까요.

 그러나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꽃그릇이요, 시멘트 울타리 안쪽에 갇힌 꽃그릇입니다. 비바람을 머금을 수 없고, 햇볕을 고루 받을 수 없습니다. 꽃냄새이든 풀냄새를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벌나비를 부르지 않습니다. 씨앗을 퍼뜨리지도 못합니다. 새로 지어지면 새로 지어질수록 우리네 자연하고는 멀어지는 아파트요, 더 늘어나면 더 늘어날수록 우리네 자연을 무너뜨리는 아파트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흐름을 살갗으로 느끼지 않는 가운데, 우리한테 넘치는 돈을 어디에 들여서 우리 주머니를 어떻게 더 부풀리느냐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 판자 대신 모르타르와 함석으로 둘러쳐진 창고는 그 주변에 생물들이 사는 것을 차갑게 거부했다. 나무줄기에 생기기 마련이던 크고 작은 구멍들도 모습을 감췄다. 큰 나무들은 재목으로 잘렸고, 오래된 고목은 쓸모없는 나무로 취급되어 잘려 없어졌기 때문이다. 먹이가 줄어들고 보금자리를 잃은 생물들이 처하게 될 운명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대로 됐을 뿐이다 … 일반 숲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 즉 생물들의 요람 구실까지 고려하면 이처럼 귀하고 고마운 숲을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고마워하지 않더라도―흔한 것을 고맙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해도― 적어도 학자나 연구자, 그리고 관청의 행정관이라는 사람들이 소홀히 하는 것은 천벌 받을 일이 아닐까. 한편 일부의 연구자나 학자들에게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살고 있는 주민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보호하거나 기념물입네 하고 떠들어대는 작태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93, 114∼115쪽)


 우리 나라는 땅이 좁아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우리 나라가 땅이 좁아 아파트를 짓지는 않습니다. 돈이 되니 지을 뿐입니다. 돈굴리기에 좋으니 짓습니다.

 어느 아파트이든 아파트 크기만큼 동과 동 사이가 벌어져야 하며, 아파트 넓이만큼 빈터가 넓어야 합니다. 창문까지 꼭꼭 틀어닫고 전기불에서 책상머리 일만 하는 사무실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이기 때문에 1층이건 꼭대기층이건 ‘햇볕이 들어와야’ 하거든요. (그래도 그늘이 지는 동이 생기도록 짓는 아파트이긴 하지만) 볕이 들도록 지어야 하는 아파트인 가운데, 놀이터와 꽃밭과 쉼터가 있도록 짓는 아파트입니다. 여기에 자가용 댈 곳은 얼마나 넓어야 합니까. 요사이는 한 집에 자가용 두어 대는 으레 굴리고 있잖아요.

 이런 아파트 지음새를 돌아본다면, 그만한 넓이를 위로 높이 올려세우기보다는, 땅바닥에 달라붙도록 알맞게 2층이나 3층으로만 지으면 훨씬 넓은 자리를 온 동네 사람이 넉넉히 쉼터로 삼을 수 있으며, 어느 집이건 햇볕과 비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느 집이든 툇간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빨래를 널 수 있고, 어느 집이든 층간소음에 시달리지 않는데다가, 집구석이 아닌 골목골목 뛰쳐나와 놀 수 있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사이좋게 지내는 길을 익힙니다.

 우리가 참삶을 바란다면 자연하고 가까울 수 있는 도시로 다시 짜야 하고, 우리가 돈삶을 바란다면 오늘날 흐름과 같이 아파트만 때려짓는 도시로 치달아야 합니다.


 (3) 《숲속 수의사의 자연일기》라는 책은


 1937년에 태어나 1963년부터 일본 훗카이도 가축진료소에서 수의사로 일하다가 1991년에 일터에서 그만둔 ‘다케타즈 미노루’라는 분이 쓴 《숲속 수의사의 자연일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스물여섯 살부터 쉰네 살까지 수의사로 일한 셈인데, 이분이 쓴 책에는 서른 해 가까이 산마을 깊은 데에 옹크리면서 뭇짐승을 만난 발자취며 느낌이며 생각이며 삶이며 알뜰히 묻어나 있습니다. 이분이 쓴 《새끼 여우 헬렌이 남긴 것》이라는 책은 영화로 만들어 2006년에 극장에 걸리기도 했답니다.

 다케타즈 미노루 님 책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청어람미디어)은 2007년 2월에 우리 말로 옮겨졌고, 《아기 여우 헬렌》(청어람미디어) 또한 2008년 7월에 우리 말로 나왔습니다.


.. 10년 전에는 마을 주변의 다섯 개의 호수와 늪은 물오리와 큰기러기, 도요새 등의 물새 떼들이 노니는 평범한 가을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수렵 금지가 해제되면 네 개의 호수와 늪에서는 단 한 마리의 새도 찾아보기 힘들고, 반대로 사냥 금지 구역인 도후쓰 호는 온통 새들로 북적였다. 살기를 바라는 생물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인간도 산다는 문제에서는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극성이었다. 밀렵에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당시에는 사냥이 금지된 호수에서 무선으로 조종하는 작은 모형보트를 달리게 하고, 놀라 날아오르는 새를 호수의 경계선 바깥쪽에서 기다렸다가 총으로 쏘는 사람도 있었다 ..  (144쪽)


 짐승을 돌보는 의사로 일했으니 누구보다 짐승을 사랑하던 분이라 할 만합니다. 글쓴이뿐 아니라 글쓴이 옆지기와 아이들도 더없이 짐승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을 테고요.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글쓴이는 ‘짐승사랑’이라든지 ‘자연사랑’을 펼쳐 보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똑같은 목숨이기 때문에, 똑같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던 이야기를 펼쳐 보였구나 싶습니다. 짐승들 살아갈 자연 터전을 사랑하자는 이야기를 넘어, 짐승이 살아가지 못하는 터전이라면 사람도 살아가지 못하는 터전임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우리 스스로 아름답고 싱그럽게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겠다는 이야기를 그려 보였구나 싶어요.

 글쓴이 다케타즈 미노루 님은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도 손을 거들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내셔널트러스트도 그러하지만, 이 운동은 ‘내 땅 지키기’가 아니라 ‘내 삶 지키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 삶 지키기’는 ‘내 마음 지키기’로 하는 일이며, 내 마음 지키기란 나를 나답게 하는 수수하고 조촐한 길이 아닌가 싶어요.


.. 다음날 아침, 옆집 아주머니에게 “어젯밤은 시끄러웠죠?” 했더니 “어머나, 그랬어요? 저희 집에서는 몰랐는데요.” 한다. 20년쯤 전이라면 으레 그런 인사가 서로 통했는데 요즘 와서는 안 통한다. 다른 집들이 모두 방한과 방음이 잘 되는 밀폐된 집으로 바뀌면서 시각적인 면은 제외하고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근대 문명은 입으로는 ‘자연과 친하게 살자’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생활에 자연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드는 시스템 기술의 확립에 바쁜 것 같다. 자연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  (183∼185쪽)


 세발이까지 갖추면서 사진을 찍고, 좋은 사진 하나 얻고자 추위를 무릅쓰기도 하던 글쓴이인데, 글쓴이가 찍은 사진은 작품사진이 아닙니다. 예술사진도 아닙니다. 풍경사진 또한 아닙니다. 자연사진이라 말하려 한다면 자연사진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자연사진보다는 삶사진이라고 해야 올바르지 싶습니다. 글쓴이는 언제나 자연하고 ‘살았’거든요. 언제나 자연에서 뭇목숨붙이를 제 이웃으로 삼으며 함께 ‘살았’거든요.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담은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사진’이라고만 글쓴이 사진을 바라보면 한 가지만 읽어내고 맙니다. 또한, 이런저런 어여쁘고 애틋한 짐승 모습을 담아낸 짐승사진이라고만 들여다보면 이때에도 한 가지밖에 읽어내지 못합니다.


.. 하지만 요즘 어린이들은 이런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그런데도 요즘 시대는 모든 것이 지식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어린이들 마음속에 있는 동물들은 도망가 버린다. 뭔가 새로운 것을 뒤쫓는 것이 과학이요, 연구라는 발상 속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는 어린이들은 자연의 불구가 되고 만다. 어디에나 있는 자연의 감동을 맛보지 못하고 어른이 될 수밖에 없다 ..  (255쪽)


 《숲속 수의사의 자연일기》는 ‘자연일기’입니다. 어김없이 자연에서 지내온 일기입니다. 글쓴이 또한 자연 가운데 하나임을 느끼며 살았던 이야기입니다. 글쓴이 스스로 자연을 지킨다는 어설픈 외침이 아닌, 스스로 자연으로 녹아들며 하루하루 즐겼던 삶자락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말나눔입니다. 잔잔한 수다라고나 할까, 따사로운 옛이야기라고나 할까, 푸근한 글줄, 곧 시라고 할까요.

 우리 누구나 자연일기를 쓸 수 있으며, 우리 누구나 자연삶을 즐길 수 있고, 우리 누구나 자연임을 책 하나에 오롯이 담아 나누어 줍니다. 자연은 우리들 가슴 어디에나 고요히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려 하는 만큼 깨어날 자연이며, 우리가 깨달으려 하는 만큼 거듭날 자연이고, 우리가 부대끼려 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는 자연입니다. (4342.6.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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