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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 배우는 자의 권리를 찾아서
츠지모토 마사시 지음, 이기원 옮김 / 지와사랑 / 2009년 3월
평점 :
이 책 하나 101 - 학교를 다니며 자유와 창조를 빼앗긴다
: 츠지모토 마사시,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 책이름 :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 글 : 츠지모토 마사시
- 옮긴이 : 이기원
- 펴낸곳 : 知와사랑 (2009.3.30.)
- 책값 : 13000원
(1) 자전거 타는 어린이는 자전거 타는 어른이 된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집부터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는 동무나 형이나 누나나 동생을 본 일이 없습니다. 자전거를 탄다 하면 집 둘레 골목길이나 아파트 주차장 같은 데에서나 탈 뿐이었습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집과 학교를 자전거로 오간 동무나 선후배를 본 일은 없습니다. 딱 한 번, 새벽에 신문배달 하는 동무가 자전거 타고 신문 돌리는 모습을 본 일이 있을 뿐입니다. 1994년에 잠깐 대학교에 들어가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둘 때까지 대학생 동무나 선후배 가운데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자가용 끌고 학교 오는 사람을 본 적은 있습니다.
.. 지금의 우리는 교육이라면 언제나 학교교육을 생각한다. 학교가 널리 보급되어 있고 서양의 근대 학문을 전제로 성립한 학교가 가장 보편적인 교육 수단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일본에서도 겨우 1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근대사적 산물이다 … 모든 아이가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한다는 근대 공교육 제도의 사상은 오랜 역사의 눈으로 볼 때 최근에 나타난 상당히 편협한 사상이다. 그렇기에 공교육 제도를 자명하다거나 최상의 교육 형태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후에도 변함없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 (8, 196쪽)
자전거를 타고 학교나 일터를 오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학생이나 회사원이 생각이 밝거나 훌륭하다고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집과 학교 사이, 집과 일터 사이가 십 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면 걸어서도 오갈 수 있는 한편 자전거를 타고 오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와 같은 길은 자가용이든 버스든 전철이든 타고 오가기보다는 오로지 우리 두 다리를 믿고 오간다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고.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학교길이나 자전거를 타고 삼십 분 남짓 들이는 회사길은 조금도 시간을 ‘길에 내버리는’ 일은 아닐 터이라고.
.. 데나라이쥬크에 다닌다는 것은 어느 데나라이 선생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데나라이쥬크라는 교육 기관에 입학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학문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어느 선생의 제자로 들어갈지는 배우는 쪽의 의지로 결정하였다. 선생의 인격, 서도의 유파, 글솜씨, 사람들의 평판 등을 여러모로 고려했을 것이다 … 가이바라 에키켄은 데나라이 선생을 올바로 선택하는 것이 학습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에키켄은 선생에 대한 신뢰감이야말로 교육과 학습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 교사와 아이의 관계는 결코 제도적인 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존경으로 맺어진 인격적이며 개인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 쥬크는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어떤 규제도 없이 자유로웠다 … 아침 몇 시에 등교하는지 그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각자 가정의 생활시간 안에서 아침식사를 마치는 대로 등교한다 … 언제 무엇을 배울 것인지는 기본적으로 배우는 이의 의사에 달렸으며 존중되었다. 교사는 학습하는 주체의 주문에 맞춰 그 기대에 부응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 (30∼31, 33, 34∼35쪽)
국민학교 적 동무, 중고등학교 적 동무, 대학교 적 동무, 그리고 군대와 회사에서 만난 동무 가운데 새롭게 ‘자전거를 타겠다’며 나선 사람은 다섯손가락으로 꼽지 못합니다. 모두 꼽으면 두엇쯤?
곰곰이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자전거 타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전거 타기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때때로 자전거모임에 들어가면서 자전거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자전거모임에라도 나가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자전거모임에 나간다 하여도 자전거 사랑을 키우는 사람보다는 쉬는날에 가끔 자전거 굴리며 놀러다니는 테두리에 머무는 사람이 거의 모두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자전거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올바르고 살가운 말’에 익숙하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올바르고 살가운 말을 나누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곤 합니다. 어릴 적부터 바른 말은커녕 알맞거나 마땅한 말을 듣거나 읽거나 말할 겨를이 없었다면, 나이가 들어 국어학자가 되고 교수나 강사가 된다 하여도 말씀씀이며 말매무새고 아름다운 쪽으로 거듭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데나라이쥬크에서 아이들이 이혼장 쓰기까지 배웠던 것이다. 아이니까 아직 가르칠 필요는 없다는 발상은 애당초 없었다.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모두 배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 개별적인 자기학습 시스템이 일반적이었던 데나라이쥬크에서는 원칙적으로 경쟁 원리는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속도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배우면 되었다. 어느 정도의 학습이 필요한가는 아이들의 능력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 부모의 생각 등에 따라 각기 달랐기 때문에 학습자는 스스로가 혹은 그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배우면 되었다 .. (45, 48쪽)
아이들이 어릴 적에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제대로 배우기 어려울 뿐더러 여러모로 힘들기 때문에 어릴 적에 가르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면, 영어만 어릴 적에 가르쳐야 좋을까요. 영어 아닌 다른 이야기는 어릴 적에 가르칠 만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영어 한 가지만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다른 모든 이야기는 안 가르쳐도 괜찮을까요.
착한 마음씨랄지, 따순 마음결이랄지, 넉넉한 마음밭이랄지, 푸진 마음그릇이랄지, 깊은 마음씀씀이랄지를 어릴 적부터 온몸에 고이 배어들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을 올바르게 꿰뚫어보도록 어릴 적부터 슬기롭게 이끌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껴안을 수 있게끔 어릴 때부터 꾸밈없이 어루만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들 어른이 아이 앞에서 ‘교육’이라는 말을 꺼내고 싶다면 말입지요. 우리들 어른이 아이를 ‘학교’에 넣으려 한다면 말입지요. 이 나라에 ‘교육부’가 있고, 교육부장관이며 교육감이며 교장ㆍ교감ㆍ교사가 있다면 말입지요.
.. 내제자가 식사 시중을 드는 중에 스승의 마음을 읽는 것이 샤미센을 연주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 직접적으로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그러나 스승을 섬기면서 샤미센을 연주하는 스승의 리듬이나 숨소리,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까지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면 높은 경지의 예술에 오를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제자가 스승으로부터 깨달아 알아차리는 능력은 일상생활의 시중이든 예술의 수련이든 간에 차이가 없다. 예술을 수련할 때만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을 떠난 일상의 장에서도 끊임없이 스승의 숨소리까지 느끼려는 노력이야말로 내제자가 되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 스승은 실제로 해 보일 뿐이다. 그러고 난 후에는 제자가 직접 스승이 했던 것과 똑같이 해 보고, 생각하고 연구하며 노력을 거듭해 가는 수밖에 없다 … 스승이 가르쳐 주는 것을 제자가 기다렸다가 그것을 배운다는 수동적인 방법은 아니다 .. (184∼186쪽)
자전거 타는 어린이는 자전거 타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는 어린이는 자전거를 타지 않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동무들을 사랑하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어린이는 세상사람과 이웃 모두를 사랑하며 어깨동무할 줄 어른으로 커 단다고 느낍니다. 어린 나날부터 거짓말이 아닌 참말로 생각을 나누고 키운 사람일 때라야, 뒷날 정치꾼이 되든 공무원이 되든 지식인이 되든 무엇이 되든, 거짓말 아닌 참말로 사랑과 믿음을 고이 베풀 줄 알게 된다고 느낍니다.
(2) 맞고 자란 어린이는 때리는 어른이 된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교사한테 흠씬 두들겨맞았다고 떠올립니다. 더 어릴 적에도 어머니한테 얻어맞지 않았으랴 싶으나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초등학교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만, 제가 떠올리는 1980년대 인천 국민학교는 1학년이고 6학년이고 가리지 않고 머리박기나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나무막대기나 밀걸레막대가 부러지도록 두들겨팼습니다. 손바닥이나 종아리는 아주 가벼운 매질이었고,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놓고도 ‘평등’이라 할 분이 있을까 궁금한데, 매질 앞에서는 늘 평등이기는 했습니다. 다만, 공부 좀더 잘하는 아이와 학교 임원인 아이와 뭔가 있는 아이를 빼놓고는.
.. 근대가 되면서 아이와 부모는 학교 시간에 맞춰 자신들의 생활시간을 결정해야 했다 … 지금의 학교 수업은 일제수업 시스템으로 등교 시간이 제각각이면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학교 수업 시간에 맞출 수밖에 없다 … 일제수업은 가르치는 쪽이 정한 커리큘럼을 따른다. 그것은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반면, 아이의 학습을 아이 자신이 아니라 가르치는 쪽이 정하게 된다 .. (33∼35쪽)
중고등학교 때에 ‘체벌 아닌 매질’을 놓고 학급토론 비슷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 교사는 우리한테 역사를 가르치며 ‘일본사람은 조선사람을 두들겨패야 말을 잘 듣는다고 말했다’며, 이런 말이 얼마나 우리를 바보로 만들었는가 하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이런 말을 하면서도 우리한테 휘두르는 매질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라는 데에 한동안 몸담을 때에 선배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얼차려를 시켰고, 군대에서는 계급에 따라 아주 마땅하다는 투로 주먹다짐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회로 돌아와 회사에 다닐 때에는 얼차려나 주먹다짐은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푸대접이 있었으며, 귀에 거슬리는 욕설과 인신공격이 있었습니다.
모습을 조금씩 달리할 뿐, 어린 나날부터 이날까지 제 둘레에는 온통 폭력이 감돌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주먹질이 될 수 있고, 국가보안법이 될 수 있으며, 어처구니없는 집임자 폭리일 수 있으며, 난데없는 재개발과 철거일 수 있는데다가, 날벼락 같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될 수 있습니다.
..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익숙해진 습관으로 몸에 배인 것은 선이든 악이든 자각적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 소유한 천성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에키켄은 행동은 선천적인 천성이라기보다는 습관, 즉 생후 교육에 의해 몸에 배는 것이 많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는 분명한 자각 없이 이루어지는 모방과 숙달의 과정이야말로 인간 형성의 가장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했다 … 아이에게 부모는 최초이자 최대의 환경이지만,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이 인적 환경이 아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가 자각하여 스스로의 행동양식을 규제하면서 아이를 위해 가장 좋은 환경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150, 156쪽)
크고작은 폭력에 길들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폭력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들은 우리를 억누르는 힘에 눌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보다 여린 이웃을 억누릅니다. 우리보다 고단한 이웃을 들볶습니다. 우리보다 낮아 보이는 이웃을 등처먹거나 울궈먹습니다. 우리보다 못 배운 이웃을 깔보고 업신여깁니다.
오래도록 폭력에 길들다 보니, 주먹질 폭력과 입질 폭력과 따돌림질 폭력 따위가 수없이 판치고, 이러한 폭력을 우리 아이들한테까지 차곡차곡 물려줍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를 낳아 기를 때 ‘엄마 말 안 듣는다’느니 ‘아빠 말 안 듣는다’느니 하면서 아이 스스로 싱그러이 피어나는 꽃망울을 밟거나 찢거나 꺾고야 맙니다.
왜 아이들은 ‘엄마 아빠 말을 고스란히 들어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엄마 말이든 아빠 말이든 ‘옳은 말이면 옳게 받아들이고 그른 말이면 그릇되었기에 바로잡거나 고쳐서 곰삭일’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가요. 왜 아이들은 어느 누구 말이라 하든 ‘아름다운 말과 살가운 말을 찾아나서거나 알아볼’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가요.
.. 커다란 책가방과 다 들어가지 못한 교재를 몇 개의 손가방에 나누어 담고는 무거워 보이는 가방들을 밑으로 축 늘어뜨린 채 등하교하는 조그마한 일본의 초등학생들을 보라 .. (201쪽)
아이들을 좁은 교실에 몰아놓고 가르치자니 교과서를 쓰게 됩니다. 아이들한테 교과서를 쓰자니 시험점수에 목매달게 됩니다. 시험점수에 목매달게 하자니 교칙을 세우고 교복을 입히고 도덕을 가르치면서 국민의례를 시킵니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한 가지 틀에 얽매이게 됩니다. 홀가분한 삶터를 못 보게 됩니다. 정답이라는 올가미에 갇힙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과 슬기를 모두어 어깨동무하는 물줄기를 못 보고야 맙니다.
그런데 그토록 아이들을 다잡아 놓는 교과서는 고등학교를 마치기만 하면 쓰레기로 내버려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하느님처럼 떠받들리던 교과서이건만, 입시를 치르고 나면 헌신짝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옳고 바르며 알맞다는 이야기를 담아 아이들 누구한테나 가르쳐야 하는 책이 교과서라면, 예수님 믿는 사람이 성경 하나를 온삶 바쳐 거듭 읽듯, 교과서 또한 내 아이한테까지 물려주면서 가르칠 만한 앎이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 결국 대학 관계자는 물론 국민 대다수는 내심 지금의 대학 입시와 그것을 위한 공부를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닐까? 현행 입시는 학습 능력이 높은 학생을 선택하는 시스템으로서 매우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 수험 세계는 경쟁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서 습득하려는 실력이란 수험 실력 외에는 없다. 그 실력의 배후에 사상적인 의미 부여 같은 것은 없다. 일류 대학에 합격할 정도의 공리적인 목표가 설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일본의 학교 교사는 교과서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아이들 측에서 보면 교과서를 배우는 일이 목적이므로 교사는 그를 위한 가이드에 지나지 않는다 … 사실 교사도 ‘교과서를 가르치는’ 편이 ‘교과서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 그러나 결국 그것이 교사를 나타하게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 (205, 222, 229∼232쪽)
맞고 자란 어린이는 때리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옳게 배우며 자란 어린이는 옳게 가르치며 나누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이 배우며 큰 어린이는 아름다움에 사랑과 믿음을 담뿍 싣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제길과 제자리를 어릴 때부터 스스로 찾도록 배운 어린이는, 어른이 된 다음 맑은 윗물이 되어 아랫물 또한 맑게 흐르도록 뒷배하는 착한 이가 된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건 안 보내건, 우리들 어른 된 사람한테 주어진 몫이라면, 우리 어른 스스로 올바른 어른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아이들 스스로 올바른 어린이로 살아가도록 손을 맞잡는 데에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어른을 보고 배우는 어린이일 테니까요. 어른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흉내내는 어린이요, 어른들이 나누는 사랑을 고스란히 따르는 어린이이며, 어른들이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사랑하면 아이들 또한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크고자 하는 어린이일 테니까요.
(3)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라는 책
일본에서 나올 때 붙은 책이름은 “배우는 자의 권리를 찾아서”였다고 하는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라는 책을 읽습니다. 우리가 굳이 일본사람이 예부터 공부해 온 길을 알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우리 길을 찾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는 “배우는 사람이 누릴 권리를 찾는” 일은 틀림없이 값이 있다고 느끼면서 집어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교육이 뒤틀렸다고 느낍니다만, 일본 또한 일본 스스로 일본 교육이 뒤틀렸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책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는 우리한테 우리 앞길을 살며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읽습니다.
.. 서점의 앞쪽에는 언제나 수험 참고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험 참고서는 전부 자습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시험 공부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직 텍스트를 반복하는 학습이다 .. (203쪽)
저는 일본에 꼭 한 번 가 보았습니다. 저한테 돈이 있다면 몇 번 더 가 보고 싶은 일본인데, 둘레에서 일본을 다녀온 분들 말씀을 듣거나 제가 보았던 일본을 떠올리면, ‘일본 책방에서 수험 참고서는 그리 안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를 쓴 분은 “서점의 앞쪽에는 언제나 수험 참고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기는, 이렇게 말할 까닭이 있습니다. 일본 교과서를 보신 분이 있는가 궁금한데, 일본은 교과서를 아주 빼어나게 잘 만듭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가장 재미없고 따분하게 만든 책이 일본 교과서’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 교과서는 어떠하느냐? 일본 교과서 발가락 때만큼도 좇지 못합니다. 일본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 교과서를 들여다보아야 ‘일본 교과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터이나, 일본사람들은 제 나라 일본이라는 ‘앞선 책나라’를 헤아린다면 ‘교과서를 너무 못 만든다’고 늘 뉘우치면서 고쳐 나가려 합니다. 이와 달리 우리 나라 한국에서는 ‘교과서를 제대로 만드는지 안 만드는지’조차 헤아리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가 또한 제대로 가누지 못하지만, 엉터리 줄거리를 담는다 하여도 한결 슬기롭고 알차고 싱그럽게 엮어내는 손길마저 없어요.
.. 모두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일본의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는 신체상의 구제를 사소한 부분까지 정해 놓고, 교칙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복을 정하고, 일정한 두발 형태를 강요하고, 혹은 여학생의 치마 길이나 주름의 숫자, 남학생의 바지 형태나 길이, 신발이나 양말의 형태, 색깔 등을 규제하고 있다 … 의복이나 머리 모양 등은 본래 아주 기본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대한 통제가 교칙이라는 이름 아래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개성 존중 교육을 추구하면서 이와 정반대로, 학교생활에 대한 통제와 관리가 용인되고, 그것을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 단체수업의 방법으로 아이들 수십 명의 개성을 어떻게 육성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그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개인의 의사에 따라 서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도로 규정된 우연적인 관계이다 .. (242∼243, 256쪽)
아이들한테 사입혀야 하는 학교옷이 수십만 원이라면서, 학부모 된 분들은 한결같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러면, 아이들한테 학교옷을 안 입히면 됩니다. 학교옷을 왜 입혀야 하느냐고 따져야 하며, 꼭 학교옷을 입혀야 하면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옷을 나눠 주고 입도록 하라고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어버이도 아이들한테서 학교옷을 벗기지 않습니다. 먹혀들지 않을 소리로 생각하기도 할 테지만, 미운털 박히기 싫을 뿐더러 아이들 스스로 ‘예쁘고 멋지고 다리 길어 보이는 이름난 회사’ 학교옷을 입고 싶어합니다.
아이들한테 학교옷을 입히고, 머리길이를 따지며, 신발이 어쩌고저쩌고 배지와 이름표가 이러쿵저러쿵하는 나라에서는 자유란 없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 푸른 나날을 학교에서 지내는 사이 ‘빼앗기는 자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스스로 자유뿐 아니라 민주와 평화와 평등과 창조와 통일을 빼앗기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더욱이, 아이 부모 된 분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토록 한 나라 사람들 모두를 바보로 삼으려고 하는 ‘겉보기 자유민주주의’ 나라는 일본하고 한국 두 나라만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아이들 옷을 ‘틀에 가두어’ 놓겠습니까. 세계 어느 겨레에서 아이들 몸을 ‘틀에 매어’ 놓겠습니까.
.. 물론 번교에 따라 작은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영민함과 둔함의 차가 있었고 진도도 다르고, 사용하는 텍스트나 학습 부분도 다르기 때문에 일제수업은 불가능했으며 단시간의 개별 지도와 혼자 행하는 비교적 장시간의 자습 활동이 기본이었다. 이 점은 어떠한 번교라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학교처럼 연령, 학년에 따라 정해진 일정한 커리큘럼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람마다 이해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각자의 속도로 학습하며, 차이에 따라 개별의 학습과 지도가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75쪽)
앞으로 누군가 쓸는지 모르는데, “한국사람은 어떻게 배웠을까?” 같은 책이 나올 날을 기다려 봅니다. 그리고,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에 걸쳐, 우리들 한국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도록 길들여지는가를 살피는 가운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 줏대를 찾거나 키우면서 바르고 곱고 맑은 사람이 되자면 어찌해야 하는가를 다룰 만한 우리 이야기책을 기다려 봅니다. ‘의무 교육’이 아닌 ‘자유 교육’으로 우리한테 ‘의무’가 아닌 ‘자유’를 심는 배움길에서 우리 손으로 새 세상을 힘차게 가꾸고 일으킬 빛줄기가 우리들 누구한테나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4342.5.2.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