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에 마음쓰기 - 골목길 거닐며 우리 말 생각
 (12) 투표의 즐거움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투표하는 곳으로 곧바로 가지 않습니다. 먼저 집 앞 헌책방에 찾아갑니다. 출판사에서 보도자료로 보내준 책 세 권을 드립니다. 저한테는 쓸모가 없을 테지만, 누군가한테는 재미있는 책이 될 수 있겠지요. 어제 들렀던 막걸리집으로 갑니다. 잔돈이 없어서 이천 원을 치르지 못하고 나왔기에 오늘 드리러 갑니다. 가게 문이 닫혀 있습니다. 아직 안 여시는 듯합니다. 창영초등학교 옆 분식집 앞을 지나갑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오늘은 학교가 쉬니까 학교 앞 분식집도 쉽니다. 백 해가 넘은 초등학교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학교 건물 옆에 조촐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를 봅니다. 언덕배기를 지나고 나오는 골목집마다 대문 위며 울타리 앞과 위며 꽃그릇이 가득 놓여 있습니다. 꽃그릇마다 새줄기가 솟고 새잎이 돋습니다. 노란 꽃과 잇빛 꽃과 발그스레한 꽃이 올망졸망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릅니다만, 보기에 좋아서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봅니다.

― 투표의 즐거움은 물론! 다양한 문화체험까지∼ (열여덟째 국회의원 뽑기를 하면 한 장씩 나누어 주는 ‘투표확인증’에 적힌 말)




 빈 차가 서 있지 않으니 널찍하게 느껴지는 골목을 걷습니다. 동사무소 가는 간판이 서 있습니다. 아차, 이제는 ‘동사무소’가 아니지요. ‘주민센터’이지요. 동사무소 이름에 영어를 섞어서 쓰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전국 동사무소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간판이 바뀌고 푯말이 바뀌고 길그림이 바뀝니다. 이름 하나 갑작스레 바뀌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갑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에다가! 온갖 문화를 누리기까지∼




 걷다 보니 어디선가 밥 냄새가 나는 듯. 뭔가?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두리번 살피니, 아하, 금창동 사무소 앞에 뻥튀기 차가 서 있군요. 뻥튀기 냄새가 온 골목에 퍼지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골목 안쪽 꽃그릇에 이팝나무 한 그루 조그맣게 자라고 있습니다.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도심지 한복판에 있는 헌 꽃그릇에 자라는 이팝나무라니! 볕을 얼마 못 쐴 듯한 자리에 자라는 이팝나무.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사진 한 장에 살그머니 담습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 더하기! 듬뿍듬뿍 맛보는 문화∼

 동사무소 계단 앞입니다. 굴렁걸상을 밀어서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옆으로 나 있기는 한데, 이런 계단을 왜 만들어야 했을까 잠깐 생각합니다. 계단 없이 살짝 비알을 주기만 해도 빗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을 텐데.

 계단을 하나 둘 셋 밟고 들어섭니다. 문간에 풍선으로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투표하는 곳에 풍선문이라, 국회의원 뽑기를 동네잔치로 즐기자는 소리일 테지!




 신분증을 보여주어 표를 받고, 흰종이와 푸른종이를 한 장씩 받은 다음, 6번과 13번을 꾹꾹 누릅니다. 반으로 접어서 흰상자와 푸른상자에 넣습니다. 앞문으로 들어와서 뒷문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종이 한 장을 건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 쓸 수 있다는 ‘투표확인증’입니다. 주차장에서도 쓸 수 있다고 나옵니다. 그렇지만 책방에서는 쓸 수 없군요.

 투표확인증은 주머니에 쑤셔넣습니다. 둘레를 보니 동네 어르신들이 투표확인증을 한 손에 들고 휘저으면서 걸어다닙니다. 이분들한테 이 투표확인증을 쓸 자리가 있을는지? 차 없는 사람은 어디에 쓸는지? 아, 우리 동네에는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있으니 거기서 쓸 수 있을 텐데, 그곳은 어른 한 사람이 500원인데. 뭐, 동네에 미술관이라도 있고(창영동에는 ‘스페이스 빔’이 있으나 거의 다 공짜이니 쓸 수도 없군!), 박물관이라도 있어야지. 우리 나라에 지정문화재가 얼마나 있다고, 그와 같은 곳에서 쓰나? 국립공원 들어가는 삯도 2007년부터는 사라졌는데, 차라리 극장값 깎아 주기라도 하든지.




 한낮에도 전기를 켜 놓아야 하는 동사무소를 나오니, 바로 앞은 기와집. 기와집 안쪽 마당에는 우람하게 자라난 목련나무 한 그루. 하얀 꽃이 사랑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동네에 길너비 50미터가 넘는 끔찍한 산업도로를 내 버리면, 이 기와집은 문화재도 뭣도 아닌 ‘낡아빠지고 지저분한 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아파트로 바뀔 테지요. (4341.4.9.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