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매진
어제까지 자리가 널널하던 ‘고흥-부산’ 시외버스인데, 아침에 읍내에 나와서 기다리며 살피니 빈자리가 없다. 설마 고흥부터 꽉 차지는 않을 테고, 순천에서 꾹꾹 타리라 본다. 흙날이라면 빈자리가 없곤 한데, 쇠날도 꽉 차네. 종이(표)는 진작 끊었기에 걱정할 일은 없다. 그런데 오늘은 이 시골에서 나들이를 가는 할매가 많다. 그래, 흙날과 해날을 끼고서 ‘도시로 나간 아이들’을 만나러 가시는구나. 또는 ‘큰고장으로 나들이’를 가시거나.
어제는 다시 개구리소리를 듣는다. 어제는 아침도 낮도 저녁도 포근했다. 이러다가 오늘 새벽은 살짝 언다. 개구리야, 포근볕이 하루이틀쯤 비추더라도 더 자야 하지 않겠니. 아직 늦겨울인걸. 곳곳에서 봄맞이꽃이 피거나 꽃망을과 잎망울이 부푼다. 나뭇가지를 쓰다듬으면 슬슬 눈뜨고 기지개를 켜려는 숨결을 푸르게 느낄 수 있다. 개구리와 풀과 벌레는 곧잘 일찍 나오기는 하는데, 나무는 깊이 숨쉬면서 나긋하고 느긋하다.
어젯밤 00시에 하루를 열고서 03시까지 글일을 추슬렀다. 살짝 눈을 붙이고서 먼길을 나서려 했는데, 06시에 이르러 일어났다. 두 시간을 더 쉬었구나. 씻고 설거지하고 짐을 꾸린다. 큰아이 배웅을 받고서 논둑길을 달린다. 시골버스를 잡고서 숨을 고른다. 하루글을 쓴다. 꿈을 그릴 적에는 나하고 네가 나란히 노래하며 스스로 지을 살림살이를 지켜볼 노릇이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닌, ‘무엇을 하려는 마음인 넋이라는 빛’을 보면 된다. 꿈을 그리며 바라보는 동안, 우리 둘레에서는 으레 가시밭이나 걸림돌을 놓는다. 우리가 휩쓸리려는지, 고요히 꿈씨를 묻으며 새길을 물어보려는지 헤아린다.
빈자리가 있으니 앉는다. 빈자리가 없으니 선다. 마음을 비우고서 생각씨앗을 빛으로 심는다. 뱃속을 비우고서 기쁘게 먹듯, 여태 쌓은 삶길은 마음밭에 옮긴 다음 새빛을 놓는다. 비우기에 비로소 빚는다. 빚이라 여기니 빈털터리이고, 비워서 빚으려 하니 빛나는 이 길을 오늘로 삼는다. ‘새옷’을 따로 ‘빔’이라 하는 뜻을 읽으면 될 텐데, 우리는 오늘날 비·비다·빚다·빚·빗·빛·빔……을 고스란히 잊고 잃는다. 빗물을 미워하고 멀리하는 데부터 이미 글러먹는다. 빗물이 들숲메를 푸르게 가꾸고, 빗물로 논밭이 푸르게 살아나고, 빗물이 깃들어 샘물로 솟아서 냇물을 이루다가 다시 바다를 파랗게 돌보는 줄 아주 까먹는다.
시외버스는 잘 달린다. 나는 아침글부터 하나 여민다. 이제 책을 읽을 테고, 오늘 만날 이웃님한테 드릴 노래를 쓰려고 한다. 노래를 몇 자락 쓰면 또 책을 읽다가 하루글을 쓸 테지. 이 노래는 늘 내가 나한테 베풀면서 두 아이한테 속삭이는 숲말이다. 이웃님한테 건네는 노래를 쓸 수 있기에, 내가 나를 돌보고 사랑하는 손끝을 새삼스레 느낀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책쓰기+책팔이’를 하려는 ‘글장사’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북돋우는 빗물과 빛살과 빚기를 이루는 빔 한 벌을 이루려고 글을 쓴다. 서로 빗대거나 견줄 까닭이 없고, 서로 빗질하고 비질하듯, 가만히 빗방울로 스미는 글을 주고받으니 함께 웃고 울면서 오늘 하루를 노래한다. 2026.2.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