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과일바구니 + 케익도 좋단다
2016년이던가,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저물녘에 전남 광주에서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작은 낱말책을 놓고서 이야기꽃을 편 적이 있다. 그날 저녁 ‘광주에서 글발 날리는 어른’이 뒷자리를 함께했다는데, ‘광주 글어른’은 대뜸 나한테 “어이, 전라도에 왔으면 나한테 인사를 하러 와야지! 왜 인사를 안 오나?” 하고 큰소리로 따졌다. 무슨 말씀을 하나 싶어서 “무슨 인사를 하라는 말씀인지요? 그리고 누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 줄 알고서 인사를 하는지요?” 하고 물어보았다. “인사를 하라면 인사를 하러 올 것이지! 무슨 말인가!” 하고 더 큰소리를 내며 대꾸를 하더라. 옆에 앉은 젊은 분이 내 팔짱을 끼면서 “아따, 거시기, 문단 어르신한테 인사 좀 오면 될 것을, 전라도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갑습니다, 선생님.” 한다. 갑자기 뭔 팔짱을 끼나 싶어 팔을 뺀다. 이이는 “선생님, 아마 곧 선생님한테 인사하러 갈 것입니다. 아직 광주나 문단을 몰라서 이러겠지요.” 하더라. ‘광주 글어른’이라는 분은 “뭐 그러겠지. 알았으면 진작에 인사를 올 터인데. 다음에 꼭 인사하러 오랑게. 인사 자알 하면 존 자리 하나 줄 터인께. 허허허!” 하더라.
뒷자리를 마치고서 다음자리(2차)를 간다고 하더라. 나는 다음자리에 갈 마음도 뜻도 없다. 얼른 길손집에 깃들어서 책을 읽고 글을 쓸 마음이다. 아까 내 팔짱을 잡고서 ‘광주 글어른’을 달래던 분이 부리나케 따라온다. “2차 가시지라?” “저는 오늘 힘들어서 얼른 쉬러 가려고 합니다.” “벌써? 아니, 이제 시작인데 벌써 간다고라? 서울사람은 다르네.”
난 ‘서울사람’이 아니고 ‘인천사람’이었으나, 전라도이건 경상도이건 ‘인천사람’이건 ‘안산사람’이건 ‘의정부사람’이건 그냥 퉁쳐서 ‘서울사람’으로 치더라.
“아따, 서울사람은 상대해 주기 힘들당께. 아무리 서울에서 오셨기로서니 그렇게 눈치가 읎소? 어르신이 인사를 하러 오라 하면 ‘네, 인사하러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하고 말해야지. 뭔 ‘무슨 인사를 하란 말씀인지요?’라니, 너무하쇼.” “네? 제가 잘못했습니까?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인데, 오늘 이 자리가 ‘인사’ 아닌가요? 무슨 인사를 따로 더 오라고 합니까? 그분이 어른이라면서, 어른이라면 먼저 고개숙일 줄 알아야 어른이지, 남더러 찾아오라 마라 하는 사람이 어른입니까?” “아따, 갑갑하게 구네잉. 마, 과일바구니 하나 들고서 인사하면 될 것을.” “네? 과일바구니요? 병문안이라도 갑니까?” “아따, 과일바구니도 모른당게? 과일바구니에 봉투 하나 담아서 가져오면 인사이제.” “네? 봉투요?” “참말로, 모르는 척하지 마쇼. 다들 하잖소? 서울만큼은 아니어도 여그서는 여그 법을 따라야제. 모처럼 서울에서 글 좀 쓴다는 양반이 전라도에 왔으니, 선생님이 자리 하나 내준다고 하지 않소?” “…….” “아이고, 모르는 척하지 마쇼. 다 알면서.”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리는 뭐고, 봉투는 또 뭔가요?” “참말로 모르요잉? 봉투에 도톰하게 넣어 오면 되지라.” “봉투에 도톰하게요? 뭘 도톰하게요? 편지를 길게 쓰라는 말씀인지요?” “아이구, 참말로 모르나, 아니면 모르는 척 너구리인가? 한 다섯 장 넣어 오면 됩니다.” “네? 다섯 장이요? 다섯 장이 뭔가요?” “아, 거참 말이 기네. 그만 하쇼.”
광주에서 고흥으로 돌아와서 둘레에 이리저리 물어보았다. ‘과일바구니’가 멋쩍으면 요새는 ‘케익’도 좋다고 한단다. ‘다섯 장’은 ‘오십만 원’이 아닌 ‘오백만 원’이라고 한단다. ‘존 자리’는 ‘연봉 2000∼3000만 원쯤 받을 만한 글쓰는 자리’라고 한다. ‘존 자리’를 받으면 틈틈이 설이나 한가위나 뭐 때를 맞춰서 ‘과일’이나 ‘케익’에 ‘봉투’를 끼워서 보내면 된단다.
‘광주 글어른’은 신춘문예를 비롯한 여러 문학상에 심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리더라. 심사위원도 하지만 틈틈이 문학상도 받더라. 아마 문학상은 그들끼리 ‘돌려주기 + 돌려받기’를 하는 듯싶다. 새해(2026) 들어서 “시를 쓰고 싶은” 사람한테 길잡이를 하겠다는 책을 하나 내셨더라. 새책을 내셔서 애쓰셨다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이보다는 열 해쯤 앞서 전남 광주 한켠에서 들은 말을 여태 잊을 수 없어서, 그때 일을 낱낱이 적어 보기로 한다. 20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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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한테 누가 되지 않'도록 글을 남기려고 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