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나한테 겉옷은



  이 겨울에 겉옷 없이 다니느냐고 타박하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빙긋 웃으며 대꾸한다. “안 더우셔요? 그렇게 둘둘 싸매면 어떻게 움직이고 무슨 일을 하나요?” 겹겹 싸매면 언뜻 따뜻해 보인다만, 어찌 걷고 어찌 아이를 안고 어찌 등짐을 메나.


  가만 보면, 몸을 안 쓰려고 두툼히 껴입는다. 안 움직이려고, 스스로 몸빛을 틔워서 일어나려고 안 하기에 지나치게 두르고 감싸고 덧씌운다. 뛰고 달리고 날고 놀고 노래하려면, 겨울이건 여름이건 가볍게 차린다. 겉으로 두껍게 덮을 적에는 몸소 피어날 기운을 가로막는다고 느낀다.


  나는 언제부터 얇게 긴소매 한 벌만 걸치며 겨울을 살아내는가 하고 돌아본다. 열두 살에 체르노빌 방사능비와 방사능유제품에 실컷 드러나서 호되게 앓는 한두 해를 보냈는데, 나도 언니도 마을아이 모두도 그때 그렇게 시달린 끝에서 내 몸이 하루아침에 바뀐 줄 느꼈다. 조금이라도 두껍게 입으면 얼굴이 벌겋게 달면서 온통 땀으로 젖었다. 한겨울에 땀으로 흥건한 옷을 자꾸 지켜보던 어머니는 두손들었다. 겉옷을 모두 치웠고, 얇게 입고서 지냈다.


  스무 살에 강원 양구 멧골짝에 깃들었다. 그곳 싸움터(군대)는 으레 -30℃에서 -40℃을 오르내렸고 칼바람이 무시무시했다. 불지기(야간경계근무)를 설 적에 -47℃까지 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얇게 살았다. 완전군장 훈련을 하는 겨울이면 미리 겉옷을 벗어서 등짐에 맸다. 난 싸움터에서 깔깔이를 아예 안 입었다. 그냥 동생(후임병)한테 줬다. 한겨울에는 눈썹에 성에나 고드름이 생기되 등판은 땀이 줄줄 흐르니 땅개(육군보병)는 다들 언앓이(동상)로 끙끙거렸다.


  추위를 타면 좀더 갖춰입을 수 있다. 그리고 ‘추위’하고 ‘겨울’이란 무엇일는지 곰곰이 돌아볼 수 있다. 어는 날씨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 몸에 찬바람을 한 줄기조차 안 받아들여야 즐거울까? 여름에 땡볕을 안 쬐어야 좋을까? 겨울에 찬바람을 안 먹기에 자꾸 아프고 앓는다고 살갗으로 느낀다. 여름에 뙤약볕과 불볕을 안 먹으니 자꾸 약에 기대며 죽어간다고 온몸으로 느낀다.


  해바람비를 머금어야 늘 싱그럽다. 여름은 여름볕과 여름바람으로 몸마음을 살린다. 겨울은 겨울눈과 겨울바람으로 마음몸을 일으킨다. 오늘날 숱한 아이어른은 철을 잊고 잃고 등지느라 나란히 앓으며 일찌감치 늙어간다고 느낀다. 해마다 봄은 봄을 먹고 여름은 여름을 먹고 가을은 가을을 먹고 겨울은 겨울을 먹기에, 사람빛을 밝히며 곱게 깨어나서 이 삶을 노래한다고 느낀다.


  해를 안 먹으니 처진다(우울증). 바람을 안 먹으니 싫어하고(불평) 좋아하는(팬덤) 굴레에 갇힌다. 비를 안 먹으니 늙는다(노화). 집을 풀꽃나무로 우거진 숲으로 짓지 않으니 생각을 안 한다(기계화+노예). 새를 곁에 품지 않으니 노래하지 않으면서 시샘(질투)에 갇힌다. 별없는 서울에서 안 떠나니 불질(분노)을 노상 퍼뜨린다.


  나한테 겉옷은 등짐이다. 내가 짊어지며 나르는 등짐으로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이 포근하다. 등짐에 담은 책을 읽는다. 살림짓는 하루를 곱씹으며 들숲메바다를 읽는다. 이미 읽은 책이 멧숲만큼 그득한데, 다시 새로 책을 장만하는 길을 나선다. 한겨울에 가벼운 차림새로 사뿐사뿐 걷는다. 2026.1.23.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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