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묵은 한용운을 읽는



  서울 숙대앞에 꽤 오랜 책집인 〈고래서점〉이 있다. 이곳이 있는 줄 진작 알았으나, 숙대앞을 갈 일이 없어서 얼추 스물 몇 해 만에 책집마실을 오늘 비로소 했다. 숙대앞에는 〈책천지〉라는 이름이던, ‘책집 아주머니(여사장)’가 계신 작은헌책집이 있었다. 이 헌책집은 숙대 교재도 조금 다뤘지만, ‘인문사회과학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칸 작은책집에 다락이 있었고, 아주머니가 앉은 둘레는 그저 책바다였다. 책손이 무슨 책을 물으면 어느새 책바다에서 건져서 건넬 뿐 아니라, 물어본 책과 얽히는 다른 책을 여기저기에서 뽑아서 건네시더라. 책손은 설 자리도 마땅하지 않으나, 이곳을 알고 단골로 찾는 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1994년에 서울에서 배움이(대학생)로 지내며 〈책천지〉를 만났는데 “숙대생도 아니고, 남학생이 여기에 오다니 처음이네!” 하고 웃으면서 반기셨다. 이무렵만 해도 서울뿐 아니라 우리나라 웬만한 큰배움터(대학교) 곁에는 작은책집(헌책집·인문사회과학서점)이 꽤 있었기 때문에, ‘배움터 앞 작은책집’에 다른 배움터 사람이 손님으로 찾는 일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숙대를 다니는 동무를 만나러 청파동에 올 적마다 〈책천지〉를 꼭 들렀는데, “오늘도 왔네? 오늘은 무슨 책을 보려나?” 하면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책벌레 젊은사내가 무슨 책을 눈여겨보고 들추고 읽는지’ 지켜보셨다. 이러던 어느 날 “이제 어떡하나? 나, 다음주에 닫는데?” 하고 또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이제 헌책방도 인문사회과학책방도 끝난 듯해. 이제는 좀 쉬려고.” 하는 말씀을 보태셨고, “그래도 우리 책방을 사랑해 주었는데, 책 한 권 선물로 주고 싶네. 값은 따지지 말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한 권은 그냥 가져가도 돼.” 하고 말씀하셨다.


 〈책천지〉는 1995년에 닫았다. 이곳이 닫으며 숙대앞이 싫었다. 책집 한 곳을 지키지 못 한다면 무슨 대학교인가 싶었다. 이러다가 2001년 무렵이었을 텐데 〈우리서점〉이 열었고, 다시 청파동을 드나들었다. 〈우리서점〉은 여러 해를 어렵게 잇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우리서점〉 책집지기는 아저씨였는데, 책집을 닫으면서 손전화도 끊으신 듯했다.


  2025년 12월 30일, 섣달그믐을 앞둔 아침에 숙대앞 〈고래서점〉에서 《萬海 韓龍雲硏究》(박노준·인권환, 통문관, 1960.9.20.첫/1975.9.20.2벌)를 만났다. 누구는 첫판 아닌 책이면 심심하다고 여기지만, 나는 첫판보다는 두벌판에 더 마음이 간다. 첫판만 겨우 찍고서 사라진 눈물겨운 책이 수두룩하다. 《萬海 韓龍雲硏究》는 1960년에 처음 찍고서 1975년에 드디어 두벌을 찍었더라. 서울 인사동 옛책집 〈통문관〉은 책집이면서 펴냄터 노릇을 했다. 통문관 이겸노 님은 이 책을 자그마치 열네 해 동안 천천히 팔면서 열다섯 해 만에 두벌을 찍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가.


  그나저나 1960년에 처음 나온 책을 엮은 분은 ‘고려대학생 여럿’이고, 이 가운데 ‘임종국’ 님 이름이 있다. 예전에도 읽은 책인데 예전에는 지나쳤나 하고 돌아본다. 아니, 예전에는 머리말은 건너뛰고서 몸글만 읽었구나. 서울에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에서 새삼스레 읽는다. 이제 말끔하고 ‘순한글’로 새책이 있을 텐데, 손빛을 곱게 머금은 흙종이책이 살갑다. 따박따박 새기며 읽고서 덮는다. 새로 다 읽고서 덮으니, 1994∼95년 사이에 작은책집에서 책집지기님이 들려주던 말과 몸짓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2025.12.30.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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