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이제는 아스라이
모든 지나간 날은 아스라하다. 그러나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웃음이건 눈물이건 모두 하루이고, 밤에 꿈길로 가면서 되새기는 이야기이다. 오늘 낮에는 곁님하고 면사무소에 다녀왔다. 둘이서 해를 보며 집밖을 걸은 지 꽤 아스라하다. 첫겨울 파란하늘을 감싸는 구름줄기는 놀랍도록 춤짓이다. 이 구름춤을 우리만 보아도 되나 싶을 만큼 눈부시다. 한창 구름바라기를 하자니 곁님이 “저 새는 무슨 새예요?” 하고 묻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냥 매이네. 척 보아도 매인 줄 알겠다. 마을 앞으로 나오는 길에 꿩 한마리가 부리나케 빈논에 시든 부들 사이로 숨으며 꽁 꽁 꽁 소리를 내더니, 매를 알아챘지 싶다.
매는 우리 머리 위로, 매우 가깝게 맴돈다. 부리랑 눈이랑 깃털이랑 꽁지랑 또렷이 보인다. “대단하구나! 눈부시구나! 기운차구나!”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맴돌이하던 매는 날갯짓조차 없이 바람을 슥 비끼며 저쪽으로 간다. ‘나래종이(연)는 매를 보며 짓지 않았을까’ 하고 곱씹는다.
낮일을 마치고서 등허리를 편다. 면사무소나 군청을 다녀오면 힘이 쪽 빠진다. 저녁을 앞두고 일어나서 읍내로 저잣마실을 간다. 책 한 자락을 쥐고서 읽는다. 긴밤(동지)이라 해가 짧지만, 거리불에 기대어 다 읽는다. 아까 시골버스에서 쓴 노래꽃을 옮겨적는다. 이제 하루글을 적어야지.
서울·큰고장은 언제나 붐비고 시끌벅적하지만, 슥 지나가는 빈소리이다. 시골 읍내는 언제나 썰렁하고 서울흉내이지만, 퀴퀴하고 죽어가는 빈수레이다. 들숲메바다를 눈여겨보기보다는, 이 죽어가는 빈수레를 쳐다보는 시골아이는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을 만하다. 들숲메바다를 파헤치고 밀어서 높고 빽빽하게 세운 서울·큰고장에서 나고자라는 서울아이는 들꽃도 길꽃도 ‘그냥 나무’도 ‘그냥 새’도 ‘그냥 나비’도 ‘그냥 사마귀’도 볼 틈이나 겨를이나 짬이 없이 하루빨리 나이들고 싶어한다고 느낀다.
시골아이도 서울아이도 이 겨울 첫머리에 무엇을 보고 듣고 받아안는 삶길일까. 두멧시골에서는 고개만 들어도 파랑하양으로 어울리는 낮그림에, 까망하양으로 아우르는 밤그림이 있다. 불빛이 아닌 별빛과 햇빛으로 서로 천천히 녹아들 수 있는 섣달을 마무르는 새해로 건너갈 수 있기를. 그냥 나무를 품고, 그냥 새랑 이웃하고, 그냥 나비랑 동무하고, 그냥 사마귀랑 노는 ‘온아이’와 ‘온어른’이 어울릴 수 있기를.
붓을 쥐어 손으로 쓰던 하루글을 멈춘다. 시골버스는 우리 마을 앞에 닿는다. 작은아이가 마중을 나온다. 작은짐을 작은아이한테 건넨다. 둘이서 긴밤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포근히 우리 보금숲으로 깃들어 비로소 저녁을 먹는다. 《요츠바랑! 16》을 읽는데 매우 따분하다. 일고여덟 살 아이가 아닌 애늙은이를 그린 듯하다. 하기는, 어버이가 아이랑 뛰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조잘대고 뒹굴지 않으면, 아이는 차츰차츰 ‘어린빛’을 잃고 잊고서 ‘애늙은이’가 되고 말더라. 2025.12.22.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