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빨리읽기



  아이하고 살아가는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본다. 아이랑 눈맞추면서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하루에, 아이 발걸음에 나란히 걷고 뛰고 달리는 오늘에, 아이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서 느긋느긋 말하는 사랑이 어울리는 노래이지 싶다. 이러면서 늘 아이한테서 배우고 활짝 웃는 살림살이일 테고. 이러다가 이따금 아이를 푸른빛으로 가르치면서 흐뭇이 춤추는 살림자락이겠지.


  아침나절에 부산 마을책집 〈책과아이들〉에 깃들어서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천천히 읽고 누리고 즐긴다. 가까이에 아이랑 나란히 앉은 어느 어머니가 그림책을 몹시 빨리 읽는다. 아이가 얼마나 알아들으려나? 글밥이 많은 그림책이라서 빨리읽기를 하시는 듯하지만, 아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어머니 말씨를 따라가려고 하는 듯한데, 그렇더라도 말이 너무 빠르다.


  나는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나는 예전에 곁님한테서 꾸지람을 들었다. 왜 이렇게 말이 빠르냐고, 좀 천천히 뜸도 들이고, 마음을 그득 담아서 말하라 했지. 나는 어려서 말이 느리고 더듬댄다고 놀리는 소리는 숱하게 들었는데, 나는 말이 빠르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는데, 이런 나조차 아이곁에서는 말이 빠를 수 있는 줄 몰랐다. 곁님 꾸지람을 듣고서 말씨를 새삼스레 가다듬었다. 아이 말씨를 더 차분히 귀담아듣는 길을 헤아렸다.


  이제는 아이하고 말할 적에 더 느긋이, 때로는 거듭거듭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느긋거듭말씨’를 몸에 붙이며 산다. 느긋거듭말씨로 스스로 가꾸며 돌아보면, 느긋이 말을 하기에 마음을 새록새록 가다듬는다. 거듭해서 말하는 사이에 생각씨앗을 북돋운다. 빠른말씨는 으레 나너우리 모두한테 강파르다. 느긋말씨는 언제나 서로서로 아늑하다. 거듭말씨는 잔소리하고 다르기에 곰곰이 익히는 맡거름이다. 찬찬말씨는 잔바람과 잔물결처럼 가벼이 흐르는 노랫가락 같기에 한결 아늑히 누리는 하루로 잇는다.


  빨리읽기는 안 나쁘되, 안 즐겁게 마런이다. 줄거리를 빨리 알아채서 뭐가 나을까? ‘셈겨룸(시험문제)’을 멈추어야 ‘생각“이 샘물로 솟아나고 멧새하고 소근소근 속삭이는 가락을 받아들인다고 본다. ‘느릿읽기’ 아닌 ‘느긋읽기’이기에, “글에 담은 마음”과 “마음에 담은 삶”과 “삶에 담은 사랑”으로 피어난다고 본다. 마음과 삶과 사랑을 읽고서 느끼고 누리는 동안에 기쁘게 생각씨를 심으려는 책을 한 자락을 쥐면 넉넉하다고 본다.


  오늘 장만한 책을 오늘부터 읽는다. 차분히 되읽고 가만히 곱읽어서 언제나 눈뜨는 오늘 하루를 살아내려고 한다. 종이를 쥔 손을 놓고서 겨울바람을 쥔다. 붓을 잡은 손을 풀고서 겨울볕을 손바닥에 놓는다. 우리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까닭이 없다. 시외버스가 달리는 길에 조용히 눈을 붙인다. 한참 달려도 한참 남으니, 느긋이 자고 일어나도 느긋이 읽고 쓸 만하다. 순천에서 시외버스를 내리고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시외버스를 갈아탄다. 또 읽고 쓴다. 부산서 순천 오는 길에 잘 잤더니 개운하다. 고흥읍에서 시외버스를 내리자마자 시골버스로 갈아탄다. 마지막으로 옆자락 황산마을에서 내린 뒤에 논두렁을 걷는다.


  해가 멧자락 너머로 갔다. 저기 큰아이가 배웅 오는 모습이 보인다. 누렇게 바뀌는 들숲하늘을 바라보며 마주걷는다. 조금씩 서로 가깝다. 일부러 더 천천히 걷는다. 마주걷는 큰아이를 기쁘게 바라본다. 우리는 짐을 나눠 들고서 집으로 걸어간다. 논두렁에도 겨울들에도 우리만 호젓이 걷는다. 물까치가 이슥한 하늘을 가르며 난다. “물까치는 이제서야 집으로 가네요.” 큰아이 말을 들으며 웃는다. 우리는 두런두런 말을 섞으면서 나란히 걷는다. 2025.12.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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