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9.24.

숨은책 1077


《칠기 공주》

 파트리스 파발로 글

 프랑수와 말라발 그림

 윤정임 옮김

 웅진주니어

 2006.6.26.



  함께 있던, 나란히 한바람을 마시던, 서로 마음으로 그곳에 있던 숱한 이야기는 언제나 오래오래 흐르리라 느낍니다. 이미 지나간 옛모습일 수 있어도, 마음과 몸과 눈과 귀에는 깊이 남아서 앞으로도 이어갈 하루일 테고요. 같이 걷던,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란도란 마음으로 어울리던 긴긴 나날은 앞으로 두고두고 새싹으로 돋으리라 느낍니다. 눈앞에 안 보이기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몸을 벗었기에 죽지 않습니다. 누구나 넋으로 살고 마주하며 빛납니다. 《칠기 공주》는 옻그릇(칠기)을 눈부시게 빚을 줄 아는 아가씨가 걸어간 삶을 들려줍니다. 우두머리는 높은자리에 앉아서 뭇사람이 조아리기를 바라고, 벼슬아치는 그저 돈을 야금야금 가로채기를 바랍니다. 뭇사람은 서로 아끼고 도우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짓습니다. 마침내 우두머리는 옻그릇 아가씨를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가두어 길들이려 하는데, 옻그릇 아가씨는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면서 홀가분한 빛으로 거듭납니다. 힘을 거머쥔 무리는 윽박지르면서 가두면 다들 꼼짝을 못 하겠거니 여기는데, 바로 우두머리·벼슬아치가 힘·돈에 꼼짝 못 하는 얼뜨기입니다. ‘살림그릇’은 “살림짓는 누구나” 누릴 수 있되, 얼뜬 힘꾼은 아예 못 건드려요. 처음이라는 마음을 잇는 눈빛이면 언제나 반짝여요. 첫마음을 잊은 채 억누르는 모든 무리야말로 어둠에 갇혀 못 헤어나오다가 죽어버립니다.


ㅍㄹㄴ


“너는 이제부터 오로지 우리의 태양보다 더 빛나는 왕을 위해서만 칠기를 만들어라.” 그러자 우탱이 머뭇거리며 말했어요. “제 딸은 그렇게 위대한 왕의 고귀한 취향을 맞춰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만드는 칠기들은 소박한 사람들, 농부나 어부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들입니다.” (7쪽)


태양보다 더 빛나는 왕은 칠기 공주를 향해 몸을 숙이더니 얼굴에 대고 쏘아붙였어요. “네 그림들은 거짓말투성이야!” “전하, 저는 제 눈으로 본 것들만 칠기에 그렸습니다.” “그렇다면 네 눈을 뽑아버리겠다!” (18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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