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엘리아스 카네티 님 책은 좋다. 반갑다. 하지만, 이분 책을 훌륭히 우리 말로 옮길 만한 사람은 우리 나라에 없을까? 훌륭하게 우리 말로 옮길 수 있도록 번역가한테 시간을 주고 마음을 써 주는 편집자나 출판사는 없을까? ... '리뷰' 대신 '번역 문제' 이야기를 풀어 보련다...

------------------------------------------------------------------------------- 
 

 부산에 사는 ㅇ님이 책을 한 꾸러미 보내 주었습니다. ㅇ님이 하나하나 사서 읽었던 책입니다. 책 안쪽에 ㅇ님이 찍어 놓은 도장 자국이 자그맣게 보입니다. ㅇ님은 이 책을 하나하나 고를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헤아리면서 고맙게 책장을 펼칩니다. 구겨지거나 접히거나 비틀린 곳 하나 없이 깨끗한 책입니다. 먼저, 엘리아스 카네티 님이 쓴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를 읽습니다.

 그러나 한 장 두 장 넘기는 책장이 자꾸 끊기고 또 끊깁니다. 책을 쓴 분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얼추 짚을 수 있으나,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는 느낌은 옅습니다. 왜 그러지? 책을 덮고 며칠 묵힙니다. 다시 책장을 펼쳐 읽습니다. 또 덮습니다. 다시 읽다가 또 덮습니다. 이러기를 보름 남짓.

 오늘 아침, 한 번 더 책을 펼쳐서 읽습니다. 오늘은 두 쪽을 넘기지 못합니다. 다시 책을 덮고 엘리아스 카네티 님이 쓴 《구제된 혀》나 《군중과 권력》을 헤아려 봅니다. 책꽂이에서 《군중과 권력》을 꺼내어 짚이는 대로 한 대목 골라 읽어 봅니다.


.. 필자는 군중결정체를 군중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경계가 분명하고 커다란 항구성을 지닌 인간들의 소집단이라고 규정한다. 이 집단은 개괄적 성격을 띠면서도 한눈에 봐서 그대로 파악될 수 있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  〈85쪽〉


 오늘 읽다가 막힌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를 다시 펼칩니다.


.. 보석 상인들은 별도의 미음자형 건물에 모여 있는데 길고 가느다란 가게 안에서 남자들이 수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24쪽〉


 우리 나라에는 날마다 수없이 많은 책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대단히 많은 책이 ‘번역’책입니다. 창작책 가운데에도 나라밖 이야기를 글감으로 삼은 책이 많고, 나라밖 책으로 공부하거나 나라밖에 나가서 둘러보거나 느끼거나 공부한 줄거리를 담은 책이 많습니다.

 책마다 자기 빛깔이 있고 얼굴이 있어서, 백 가지 책이라면 백 가지 빛깔과 얼굴을 느낀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요즘 나오는 백 가지 책을 보면서 백 가지 빛깔이나 얼굴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다 똑같은 빛깔이라고, 다 어슷비슷한 얼굴이라고 느낍니다.

 어린이책 번역을 보아도, 어른책 번역을 보아도 매한가지입니다. 먼저, 책을 써낸 사람, 글쓴이 모습이나 말씨나 얼굴이나 말투나 느낌을 읽기 어렵습니다.

 책을 써낸 사람마다 이름이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마다 자기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나라가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이 살아온 겨레붙이가 다를 테고, 책을 써낸 사람이 어울리며 만나는 사람이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부대끼는 삶과 삶터가 다를 테며, 책을 써낸 사람마다 쓰는 말이 다를 텐데. 책을 써낸 사람마다 생각하며 나타내려는 이야기가 다르고, 책을 써낸 사람마다 바라거나 꿈꾸는 세상이 다를 텐데.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를 읽다가 막힌 대목을, “보석장수들은 따로 ㅁ자 꼴로 지은 건물에 모여 있는데, 길쭉하고 좁은 가게에서 손수 보석을 다듬고 있다”쯤으로 다듬어 봅니다. 썩 내키지 않습니다. 번역책을 읽으면서 왜 번역글을 다듬으며 읽어야 하지? 막힘없이 술술 읽을 수 없는지?

 들뢰즈를 우리 말로 옮길 때, 들뢰즈처럼, 또는 들뢰즈보다 더 깊이 학문을 갈고닦아야 가장 훌륭하게 들뢰즈를 옮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페이터 산문을 우리 말로 옮길 때, 페이터가 살았던 지난날과 그 나라 문화와 사회를 두루 톺아보는 눈길이 없다고 해서 페이터 산문을 우리 말로 옮길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해 봅니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일제강점기 때 이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짓밟히고 시름시름 앓으며 고달팠는가를 돌아보는 마음이 없이 〈낙엽을 태우며〉를 읽거나 〈학도여 성전에 나가라〉를 읽을 때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목넘이 마을의 개〉는, 〈탁류〉는, 〈모래톱 이야기〉는 지난 우리 삶과 역사를 굽어살피지 않으면서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헤아릴 만한 작품일까요. 〈잉여인간〉은, 〈당신들의 천국〉은, 〈유예〉는 지금 우리 삶과 터전이 어떠한 모습인지 넘겨다보지 않으면서도 알뜰하게 곰삭이면서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품일까요. 흘려들은 지식하고 머리로 생각한 깜냥만으로 〈태백산맥〉이나 〈봄날〉이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속속들이 새겨읽을 수 있을까요.

 가와바타 야스나리 님이 쓴 〈눈나라(설국)〉는, 이 작품으로만 훌륭했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을까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라는 사람이 일본 문화와 문학을 모두 사랑하면서, 일본사람과 하나가 되어 도쿄에 살면서 〈눈나라〉를 미국말로 옮겨내지 않았을 때에도 〈눈나라〉는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을까요. 일본말로 된 문학을 미국말로 옮긴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도쿄 이야기》를 썼고,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를 썼습니다. 두 가지 책 모두, 일본사람 저리 가라 할 만큼 일본과 도쿄 문화와 사회를 깊이 꿰뚫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정체성인 ‘미국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이 나라 아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초등학교에 들지도 않았는데 영어를 배우고 한문을 외우는 이 나라 아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 토요일 잠깐 서울 나들이를 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에서 “마미! 마미!”를 외치는 어린 계집아이를 보았습니다. “엄마! 엄마!”를 외치지 않고 “마미! 마미!”를 외치는 어린아이는 여덟아홉 살쯤? 아이 어머니는 딸아이가 ‘마미’라고 해도 “원 녀석두, 마미가 뭐니, 엄마지 않구?” 하고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닌 ‘마미’라고 쓸 줄 알아야 영어가 몸에 익은 생활말로 버릇으로 굳어서, 앞으로 일류대학교에 들어가자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영어를 그렇게 생활말로 쓰면 좋지’ 하고는 느낄는지 모릅니다.

 이리하여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기는 인터넷게임에서도, ‘준비, 땅!’이 아니라, ‘ready, start!(또는 ready, go!)’가 버젓이 알파벳 글자로 찍혀서 화면을 채웁니다. 스물 안팎 젊은이들이 ‘고 고 고’라고 말하기에 무슨 소리인가 한참 알쏭달쏭해 한 적이 있습니다. 시내버스에서도 영어로 안내방송이 나오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미국말을 쓰는 미국이나 영국이나 필리핀이나 다른 유럽나라 문화와 사회를 우리들은 얼마나 잘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이토록 미국말이 우리 삶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는 이 나라에서, 한국말로 창작한 문학이며 예술이며 문화며, 미국말로 옮겨서 소개하거나 알리는 일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미국말 할 줄 아는 사람 많고, 일본말 할 줄 아는 사람 많으며, 중국말 할 줄 아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나라밖 말 잘하는 사람’들은, 우리 문화와 문학과 예술을 나라밖 사람들한테 ‘그 나라밖 사람들이 살갗으로 느끼며 받아들일 만큼 들려줄 만한’ 높낮이가 되어 있는지요.

 어쩌면, 제가 너무나 많이 바라는지 모릅니다. 너무 높은 자리를 꿈꾸는지 모릅니다. 《Death of a Salesman》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밖에 옮길 줄 모르는 이 나라인데. 《Being and Nothingness》을 《존재와 무》로밖에 옮길 줄 모르는 이 나라 사람들인데.


.. It was a bright cold day in April, and the clocks were striking thirteen ..


 번역가가 아닌, 이 나라 대학생들이, 또 고등학생이, 또 초등학생이, 또 토익점수 높게 받은 사람이, 이 글월 하나를 우리 말로 옮긴다면 어떻게 옮길까요. 이 글월은 조지 오웰 님이 쓴 《1984》 첫 줄입니다. (4340.10.31.불.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졸음꾼 2009-03-2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전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우연히 카네티를 검색하다...허나 두 번째 지적 부분은 교정자도 충분히 잡아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전 직장 동료들과 이런 얘길 한 적이 있어요. '제대로 된' 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어 문장 구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그룹별로 외국어를 하나씩 무작위로 뽑게 한 다음 그 언어를 죽기 살기로 가르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외국어는 스파르타식으로 좀 휘몰아치면 웬만큼 언어감각이 있는 사람은 잘 배우잖아요~ 뭐 행간의 의미야 차차 실력이 늘면서 보이는 거니까...그런데 세일즈맨의 죽음이 '세일즈맨의 죽음'이면 안 되나요?

파란놀 2009-04-14 14:50   좋아요 0 | URL
세일즈맨의 죽음은... 언젠가 쓴 글이 있는데... 좀 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