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5.23. 칼에 가둔 몸
합천 어린씨랑 어른씨를 만나고서 이틀에 걸쳐서 이야기꽃을 폈다. 진주랑 순천을 거쳐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순천버스나루에서 열린뒷간을 들어가는데, 똥을 누고서 그대로 내뺀 자국을 본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고흥에서도 이 나라 어디에서도 흔히 보는 모습이다. 돌이쉼칸(남자화장실)만 이럴까? 순이쉼칸(여자화장실)도 물을 안 내리는 분이 적잖다고 듣는데, 시골집처럼 퍼내는 뒷간을 쓰기에 물내림쉼칸을 이 꼴로 해놓는가 싶어 갸우뚱한다.
이따금 생각에 잠긴다. 책을 안 읽으니 밑동(기본예절)이 없을까? 책을 읽어도 밑동이 없을까? 새롭게 배우고 익혀서 스스로 빛내려는 마음이 있다면, 밑동이 든든히 서는 나무를 담은 ‘나’이리라. 안 배우고 안 익히느라 그저 빛바랜 채 버릇대로 길든 삶이라면, 제 마음도 안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망가지느라 ‘나’가 사라지면서 나뒹굴지 싶다.
시외버스에서 책을 읽으려다가 내처 잤다. 시외버스를 한참 타야 하니 조금은 자고 조금은 기지개를 켜면 될 테지.
칼은 도마를 놓고 밥을 지을 적에 쓸 일이다. 몸에 칼을 대면 스스로 죽겠다는 뜻이다. 몸에는 포근히 어루만지는 손길을 대어 살살 살려야지 싶다. 칼을 대어 바꾸거나 꾸미면 그만 몸에 갇힌다고 느낀다. ‘미운몸’이란 없기에 미운몸을 고칠 까닭이 없다. ‘예쁜몸’이란 없으니 예뻐 보이도록 꾸밀 까닭이 없다.
나무 한 그루에 맺는 잎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새로 돋는 풀싹은 저마다 다르게 생긴 잎빛이다. 우리는 나무처럼 잎처럼 풀처럼 모두 다르게 빛나기에 푸른넋이자 파란숨이라고 본다. 몸을 가두지 말고 살리자. 몸에 칼이 아닌 눈빛을 놓자. 손에 칼이 아닌 호미랑 붓을 쥐자.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