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1.28. 금수저 흙수저 풀수저 숲수저
큰아이가 여덟 살로 접어들 즈음부터 “이제 더는 설과 한가위에는 못 다니겠구나!” 하고 느꼈다. 두 집안 어르신은 설과 한가위가 아닌 때에 아무리 자주 찾아가더라도 “설에 안 오면 아예 안 온 셈이지!” 하고 여기셨다. “그러면 설과 한가위에만 오고, 다른 날에는 안 와도 될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그렇다고 설에만 오면 섭섭하지!” 하시더라.
큰잔치를 이룬다는 설과 한가위에 여러 집안 여러 아이어른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뜻깊다. 그런데 뜻깊은 자리를 꼭 가장 붐빌 적에 해야 할는지 돌아볼 노릇이다. 왜 그렇겠는가? 설과 한가위가 큰잔치를 이루던 지난날에는 온집안이 그저 한마을에 살았고, 재나 고개 너머 옆마을에 이웃으로 지냈다. 그래서 지난날에는 설이건 한가위이건 마땅히 한집에 왁자지껄 모일 뿐 아니라, 서로서로 마실을 가면서 북적일 만하다.
이와 달리 오늘날은 다들 멀리 떨어져서 산다. 멀리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이 설과 한가위에 맞추어 함께 움직이면 그야말로 나라가 멈출 뿐 아니라, 온나라 길바닥은 매캐하고 어지럽고 더럽고 끔찍하다. 설과 한가위에 시골이 얼마나 망가지고 더러우며 시끄러운가. 설과 한가위가 지나면, 이동안 서울사람이 시골에 버린 쓰레기가 수북수북 흘러넘친다.
요즈음은 설이나 한가위에 바깥마실을 가는 사람이 많다는데, 이들은 ‘금수저’라서 바깥마실을 간다고 느끼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금수저인 분이라면 굳이 설이나 한가위에 나라밖마실을 안 가겠지. 금수저인 분들이 뭣하러 그렇게 붐비는 철에 힘들여 움직이겠는가. 금수저는 그냥 한갓진 때에 언제라도 나라밖으로 마실을 다녀온다.
오히려 금수저가 아닌 분들이 바로 설이나 한가위에라도 틈을 내어 나라밖마실을 가려고 하지 싶다. 다만, 금수저는 아니어도 금수저에 가 닿으려고 애쓰면서 목돈을 모은 분들이 설이나 한가위에 나라밖으로 나갈 테지.
나는 그냥 시골사람이다. 나처럼 그냥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설이나 한가위뿐 아니라, 여느 때에도 조용히 시골에서 하늘바라기와 바람바라기와 새바라기를 한다. 구태여 멀리 나가야 하지 않는다. 멧새가 어련히 찾아와서 노래를 베푼다. 한가위 언저리에는 풀벌레와 개구리 노래잔치가 흐드러진다. 2025년 설날 밤에도 맨눈으로 미리내를 볼 수 있었는데, 이무렵 전남 고흥으로 찾아온 서울내기는 요 몇날만큼이라도 별바라기를 조금 했을까?
나는 스스로 ‘흙수저’가 아닌 ‘풀수저’나 ‘숲수저’로 여긴다. 어떤 수저를 쥐느냐를 놓고서 싸우거나 미워하거나 시샘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사랑수저’와 ‘노래수저’와 ‘아이돌봄수저’로 ‘살림수저’를 가꾸는 하루이면, 온누리가 아늑(평화)하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