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의 동쪽 민음의 시 229
오정국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노래책시렁 462


《눈먼 자의 동쪽》

 오정국

 민음사

 2016.12.29.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쓸 노릇입니다. ‘문학’을 하려고 들면 망가집니다. 노래를 하고 싶다면 노래를 할 일입니다. ‘시창작’을 하려고 나서면 어긋납니다. 말을 해야 알아들을 테지만, ‘강의·수업’을 하니 삶하고 동떨어져요. 겉치레로는 못 살립니다. 허울로는 죽입니다. 알맹이가 차야 싹이 트고 자라요. 쭉정이로는 번지르르할 뿐입니다. 《눈먼 자의 동쪽》을 읽으면서 오늘날 숱한 ‘시문학’이 다 이렇게 꾸미고 엮는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삶을 쓸 줄 모르거나 삶하고 등지기에 ‘문학적 표현’에 얽매입니다. 살림을 안 하거나 살림짓기를 모르기에 ‘시적 수사·기교’에 갇힙니다. 스스로 살아낸 하루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으면 됩니다. 스스로 살림하는 손길로 고스란히 말을 하고 글로 옮기면 넉넉합니다. 있지 않은 삶을 붙이려니 꾸밉니다. 하지 않은 살림을 내세우려니 덧바릅니다. 붓을 쥐기 앞서 도마를 놓고서 밥을 지을 하루예요. 글을 쓰기 앞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볼 오늘입니다. 책을 읽기 앞서 하늘과 별과 바람을 읽을 사람입니다. 삶을 쓰지 않기에 겉치레라면, 살림을 안 하기에 허울입니다. 사랑을 안 하기에 꾸민다면, 사랑을 모르기에 헤맵니다.


ㅅㄴㄹ


아낙네의 사타구니를 훑듯, 코로 주둥이로 밭고랑을 뒤지던 / 산짐승을 내동댕이쳐 놓고, 서부영화의 총잡이처럼 / 총구를 훅 부는 사내의 / 떡 벌어진 어깨 너머, 진저리를 치듯 / 목덜미를 떠는 멧돼지의 / 눈알이여, 그 어디서 눈 맞췄던 굶주림이냐. 패악이라면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15쪽)


일주일째 고기 비린내를 맡지 못했더니 / 장작개비의 나뭇결이 고등어 뼈로 보였다 / 누추한 먹이를 구하지 말라 했으니 / 백담계곡 눈길을 올라가는 것인데 / 간밤의 취기와 / 용서할 수 없는 고통의 소용돌이를 / 절벽 앞에 세워 둔 사내가 있었다 (눈 뭉치로 눈 벼락을 맞는/41쪽)


+


《눈먼 자의 동쪽》(오정국, 민음사, 2016)


입은 수천 겹의 굶주림으로 일그러져 있고

→ 입은 숱하게 굶주려 일그러지고

→ 입은 겹겹이 굶주려 일그러지고

18쪽


혈액투석을 하듯 당신은

→ 피거름을 하듯 그대는

→ 피씻이를 하듯 너는

23쪽


겨우겨우 눈을 틔우기 시작했다

→ 겨우겨우 눈을 틔운다

32쪽


내가 나의 궁기를 지키듯

→ 내가 내 가난을 지키듯

→ 내가 이 밑바닥 지키듯

33쪽


백담계곡 눈길을 올라가는 것인데

→ 온못골 눈길을 올라가는데

41쪽


한천(寒天)의 얼음 골이

→ 눈하늘 얼음골이

→ 겨울하늘 얼음골이

→ 찬하늘 얼음골이

49쪽


공중의 햇빛은 내 빈손을 빛나게 하고

→ 저 하늘 햇빛으로 내 빈손이 빛나고

→ 높다란 햇빛으로 이 빈손이 빛나고

49쪽


아릿한 문신(文身)들

→ 아릿한 몸글씨

→ 아릿한 몸무늬

59쪽


천군만마의 발굽 소리가 지나갔다

→ 든든하게 발굽 소리가 지나갔다

→ 도와주는 발굽 소리가 지나갔다

66쪽


뱀의 대가리는

→ 뱀대가리는

7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