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2024.9.3. 공중전화와 책



  아마 1998년 이른봄이었을 텐데, 싸움터(군대)를 마치고 바깥으로 돌아온 어느 날,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을 쥐고서 길에서 걸어다니며 읽다가 길소리(공중전화)를 걸던 일이 있다. 그무렵에는 손소리 없이 길소리를 걸던 사람이 훨씬 많았다. 만나기로 한 사람한테 길소리로 얘기한 뒤에 나왔는데, 조금 걷다 보니 어쩐지 손이 허전하더라. 아차, 아까까지 길을 걸으면서 읽던 책을 길소리에 얹어놓고서 그냥 나왔구나! 오던 길을 거슬러서 부랴부랴 허겁지겁 달려갔는데,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은 이미 사라졌다. 감쪽같았다. 그리 길지 않은 틈이었는데, 사이에 길소리를 쓴 분이 슬쩍했겠지. 한동안 둘레를 이리 달리고 저리 뛰었지만, 책을 슬쩍한 사람을 찾을 길은 없었다. 그 뒤로 한동안 이 책을 다시 못 보기도 했는데, “책을 슬쩍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도둑이로구나!” 하고 느꼈다. 책에 이름도 적었고, 읽다가 책갈피를 꽂아놓았으니, 누가 깜빡한 책인 줄 뻔한데, 슬쩍한 분이 이 책을 읽고 싶었으리라 여기면서도 왜 책임자가 찾아오도록 그냥 두지 않았나 하고 한참 곱씹던 일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움직이다가 무릎셈틀이며 사진기를 담은 묵직한 짐을 짐칸에 올려놓았다가 깜빡 잊고서 내린 뒤에 역무원한테 전화한 적이 있는데, 고작 다음 나루에 닿는 사이에 이미 무릎셈틀하고 사진기를 담은 묵직한 짐을 슬쩍한 사람도 있었다. 택시 짐칸에 실은 사진기가방을 안 내려주고서 달아난 택시일꾼도 있었다. 그들은 얼핏 눈앞에서 쏠쏠히 재미를 본다고 여길는지 모르는데, 빼앗는 사람은 으레 즈믄곱(1000배)으로 잘못을 씻으리라고 느낀다. 나라지기란 자리에 앉아서 한동안 우쭐거리는 적잖은 무리도 언제나 한때일 뿐이다. 높자리는 오래 안 간다. 곧 바닥으로 떨어질 텐데, 그들은 그들이 바닥에 떨어질 줄은 아예 어림조차 못 하면서 쳇바퀴에 갇힌 콧대에 사로잡혔어도, 이 모습을 알아보지 못 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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