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2024.9.12. 언제나 첫글



  새벽에 일어나서 글살림을 지필 적이건, 한참 집살림을 추스르고서 다시 글살림을 여밀 적이건, 이제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기 앞서 끝으로 글살림을 다스릴 적이건, 모든 글은 첫글이라고 느낀다.


  집밖으로 멀리 일하러 다녀오는 길이면, 밤에 길손집에 깃드는데, 모든 짐을 풀어놓고서 드디어 땀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무릎셈틀을 꺼낼 적에도, 새삼스레 첫글을 쓰는구나 하고 느낀다. 그동안 많이 써온 글이 아닌, “집셈틀 글쓰기”이건 “무릎셈틀 글쓰기”이건 “길이나 버스에서 쪽글쓰기”이건, 오늘 이곳에서 바로 나를 스스로 돌아보며 남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글 한 자락이라고 느낀다.


  열 꼭지나 스무 꼭지에 이르는 글을 바지런히 여밀 적에도 “어느 글을 오늘 첫글로 띄울까?” 하고 헤아리면서 설렌다. 이제 무릎셈틀을 덮고서 다시 짐을 추슬러 등짐을 묵직하게 짊어지고서 시외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도 “어느 글을 오늘 끝끌로 띄울까?” 하고 곱씹으면서 두근두근하다.


  아침은 누구한테나 언제나 첫날이다. 밤은 누구한테나 언제나 끝날이다. 우리는 날마다 죽고 태어난다. 우리는 다 다른 하루를 다 다르게 태어나서 다 다르게 누리다가 다 다르게 죽는다. ‘죽다’는 나쁜말이지 않다. ‘태어나다’는 좋은말이지 않다. 그저 내가 나로서 따뜻한 기운을 품고서 타오르듯 이곳에 나오고, 이제는 숨결이 줄어서 사그라드는 길로 푸근히 쉴 뿐이다.


  모든 삶은 첫발을 내딛는 꿈씨앗이다. 모든 밤은 첫길로 나아가는 꿈밭이다. 모든 아침은 첫이슬을 마시는 삶노래이다. 모든 낮은 날갯짓으로 피어나는 일놀이에 살림빛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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