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58 낮은 데로 임하소서



  어릴 적부터 “낮은 데로 임하소서”란 말을 들으며 늘 거북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 하고 속으로 “뭐야? 그냥 우리 곁에 있으면 되지, 뭘 낮은 데로 오라고 그래? 높은 데 있는 어느 누가 우리 곁에 온다고?” 같은 혼잣말을 했다. 열네 살이 되어 1988년에 들어간 푸른배움터(중학교)에서 옛자취(역사)를 배우는데, 그때 길잡이가 “브 나로드(민중 속으로)”를 알려주었다. “민중 속으로”로 풀이한 러시아말을 다시 듣자마자 코웃음이 나왔다. “뭐야? 처음부터 우리(민중)하고 같이 안 살았으면서 우리한테 온다고? 그래서 어떻게 산다는 얘기야? 버틸 수나 있어?”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들(진보·좌파)은 아주 쉽게 말한다. “낮은 데”로 가겠다느니 “민중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외친다. 그런데 왜 외치지? 그냥 ‘우리(가난하고 이름이나 힘이나 돈이 없는 사람)’하고 나란히 이웃집으로 살면 되지 않나? 우리 곁에서 살려고 할 적에 왜 자꾸 먼저 이름을 붙이고 글을 써서 알려야 할까? 건축이나 예술이나 사진이나 문학이나 철학이나, 아무튼 뭔가 한다는 이들치고서 골목집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꼴을 본 적이 아예 없다. 굳이 가난해야 뭔가 할 수 있지 않다. 가난하건 가멸차건 그저 살림살이가 다를 뿐이다. 가멸찬 살림이라면 가멸찬 살림을 누리면서 글을 쓰건 문화예술이건 하면 된다. 가난한 살림이라면 가난한 살림을 돌보면서 이모저모 하면 된다. 내가 살던 마을이나, 내가 다닌 배움터는 가난한 데였지만, 이 가운데 꽤 가멸찬 집도 있었다. 가멸차게 살던 이웃 가운데 돈티를 내는 이가 드물게 있었으나, 그저 스스럼없이 섞였다. 곰곰이 보니, 가난마을에서 살아가는 글바치(작가·기자)는 여태 못 봤다. 그들은 다 하늘나라에서 사는 듯하더라. ‘가난한 이웃’을 사진으로 담겠다고 하는 이들은 으레 ‘안 가난한 사람’이다 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길로 사진을 찍더라. 골목집에서 안 살고 잿집(아파트)에서 살며 이따금 골목마을로 ‘출사(사진마실)’를 나오는 이들이 골목을 어떻게 보고 느껴서 담겠는가? 겉치레나 허울일 뿐이다. 스스로 골목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골목빛을 담아내는 사람이 찍는 사진은 아주 다르다. 스스로 마을사람이나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며 ‘순이돌이(장삼이사)’를 담는 글도 무척 다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하고 읊는 이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에 겉치레이다. “민중 속으로” 또는 “국민과 함게”라 읊는 이도 언제나 뻥에 겉핥기이다. 적어도 열 해 남짓 가난한 골목집이나 시골집을 보금자리로 일구어 보고 나서야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조금은 기웃거릴 만하리라. 열 해조차도 골목집이나 시골집에서 살아내지 않는 몸으로 ‘구도심 재개발 건축디자인’이라든지 ‘소멸위기 대책 수립’을 읊으려 한다면, 하나같이 그들 돈벌이를 하는 셈이다. 걸어다니거나 시골버스를 타지 않는 사람이 시골이나 마을을 알 턱이 없다. 아이를 업은 채 자장노래를 부르고 똥오줌기저귀를 손수 삶고 말려서 대는 수수한 살림을 누린 적이 없는 이들이 쓰는 글이나 내놓는 예술작품이 ‘서민’을 보여준다고 할 수 없다. 부디 낮은 데로 오지 마십시오. 그저 어깨동무를 하며 살아갑시다. 굳이 민중 속으로 오지 마십시오. 모든 돈과 이름과 힘을 내려놓고서 조용조용 흙을 만지고 풀꽃나무랑 동무하면서 바람을 읽고 새노래랑 풀벌레노래를 들으십시오. 열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말을 하면 된다. 열 살 어린이가 지켜보고 살펴볼 만한 즐겁고 반가운 이슬받이로 하루를 지으면 된다. 열 살 어린이가 쇳덩이(자동차)를 모는가? 안 몬다. 그러니까 낮은 데로 오지 말고, 쇳덩이를 버리면 된다. 열 살 어린이가 몇 억을 훌쩍 넘는 잿집(아파트)을 사들이는가? 아니겠지. 잿집은 집어치우고서 ‘마당 있는 시골집’으로 터전을 옮기면 된다. 입발린 글은 ‘낮은 사람들’한테도 이바지하지 못 할 뿐 아니라, ‘낮은 데로 가겠다’는 그들 스스로한테부터 이바지하지 못 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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