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행 창비시선 12
이성부 지음 / 창비 / 1977년 7월
평점 :
품절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3.11.5.

노래책시렁 277


《百濟行》

 이성부

 창작과비평사

 1977.7.10.



  지나온 나날을 거슬러서 글을 읽노라면 뜻밖이거나 뜬금없구나 싶은 줄거리를 곧잘 봅니다. 그때에는 으레 그랬거니 하고 여길 줄거리가 아닌, 그때부터 이렇게 높낮이가 갈렸구나 하고 느낄 대목입니다. 그때부터 이런 글줄을 나무라거나 타박하지 않고서 버젓이 실으면서 ‘시’요 ‘문학’이라고 치켜세웠으니, 우리 글밭이며 책밭이 오늘날 같을 만하구나 싶어요. 《百濟行》을 모처럼 되읽다가 툭하면 술판을 벌인 글바치 뒷모습을 엿보고, 집안일을 않는 웃사내 몸짓을 느끼고, ‘시를 쓴다면서 밥어미를 거느리던 살림’일 수 있나 아리송하며, ‘철도 예순 돌’을 기린다는 글줄에 “어린 날 마신 술”을 읊조리는 이 터무니없이 철없는 사람들이 여태 뭘 해왔나 하고 곱씹습니다. 그들은 무슨 돈으로 술을 펐을까요? 그들은 어떤 술집을 드나들었을까요? 그들이 벌인 술자리에는 옆에 누구를 앉혔을까요? ‘백제길’처럼 적지도 못하고 ‘百濟行’으로 적으면서 한자 솜씨를 자랑하는 글은 낡아도 한참 낡았습니다. “내 革命도 짓밟아버린 지 오래면서 / 지 섹스도 가두어둔 지 오래면서”처럼 이녁 곁님을 깔보고 노리개처럼 바라보는 글자락이란 얼마나 안쓰러운지요. 그러나 그때에나 이때에나 이런 글이 아직도 시에 문학이라고 합니다.


ㅅㄴㄹ


우리나라는 왜 이다지도 / 노여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으냐. / 마련된 칼로 저마다의 가슴만을 찌르며 / 왜 이다지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냐. (밤샘을 하며/7쪽)


만나면 우리 / 왜 술만 마시며 / 저를 썩히는가. / 저질러 버리는가. // 좋은 계절에도 / 변함없는 사랑에도 / 안으로 문닫는 / 가슴이 되고 말았는가. (만날 때마다/34쪽)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면서 / 식구가 늘었으니 식모 없이도 된다면서 / 아내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핀다. / 내 革命도 짓밟아버린 지 오래면서 / 지 섹스도 가두어둔 지 오래면서 / 조심스레 조심스레 / 나를 살핀다. (新生/48쪽)


미처 늦어버린 세월에도 / 自由에도 絶望에도 / 늠름한 勝利처럼 / 거만한 詩처럼 // 열차는 달려온다. / 어린 날 마신 술의 / 저 언덕 넘어서…… (列車, 철도창설 68주년 기념일에/105쪽)


+


《百濟行》(이성부, 창작과비평사, 1977)


깊은 밤 渾身의 힘으로써 간추린 이 한마디 말들을, 멈춘 시간의, 캄캄함 속을 빠지고 빠지다가

→ 깊은 밤 안간힘으로써 간추린 이 한 마디 말을, 멈춘 하루에, 캄캄한 곳을 빠지고 빠지다가

6쪽


더 큰 海溢을 거느리고 사랑을 거느리고

→ 더 큰 너울을 거느리고 사랑을 거느리고

17쪽


식구가 늘었으니 식모 없이도 된다면서

→ 손이 늘었으니 밥지기 없어도 된다면서

→ 사람이 늘었으니 드난이 없어도 된다며

48쪽


지 섹스도 가두어둔 지 오래면서 조심스레 조심스레 나를 살핀다

→ 지 살곶이도 가두어둔 지 오래면서 살살 슬슬 나를 본다

→ 지 밤일도 가두어둔지 오래면서 살그머니 슬그머니 나를 본다

→ 지 밤놀이도 가두어둔지 오래면서 나를 살펴본다

48쪽


어린 날 마신 술의 저 언덕 넘어서

→ 어린 날 술 마신 저 언덕 넘어서

105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