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들 창비시선 79
고재종 지음 / 창비 / 1989년 9월
평점 :
품절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2023.9.30.

노래책시렁 341

《새벽 들》
 고재종
 창작과비평사
 1989.9.15.


  나락이 물결치는 가을들을 보면 똑같은 낟알은 하나조차 없습니다. 나락들 곁 도랑에서 자라는 억새를 보면 똑같은 억새꽃도 억새씨도 없습니다. 봄여름에 벌레잡이를 하고서 가을에 낟알을 조금 훑는 참새는 으레 떼지어 날갯짓을 하는데, 쉰이나 아흔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도 다 다른 참새입니다. 오늘날은 모심개(이앙기)로 똑같이 때려박고서, 벼베개(콤바인)로 똑같이 잘라내지만, 지난날에는 손으로 다 다르게 심고서, 낫으로 다 다르게 거두었습니다. 손으로 밥옷집을 짓던 지난날에는 나락도 남새도 열매도 다 다른 숨결인데, 틀(기계)로 욱여넣는 오늘날은 삶도 글도 넋도 똑같이 수렁에 잠기는구나 싶어요. 《새벽 들》을 가만히 읽습니다. 열 살 딸아이한테 고기덮밥을 먹이던 하루를 1989년하고 2023년은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려나요? 1989년 아닌 2023년에도 풀죽임물을 듬뿍 뿌리려나요? 이제는 안 뿌리려나요? 〈로빙화〉에 나오는 아이가 사람들 가슴을 적시는 눈부신 그림을 어떻게 낳았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요. ‘풀죽임물’이 아닌 ‘손가락·젓가락’으로 애벌레를 하나하나 떼었어요. 아이 옷가지를 빨래하고, 아이 밥차림을 돌보고, 아이 말씨를 북돋우듯, 그저 오늘을 사랑으로 살리면 언제나 푸른노래입니다.


굽고 지지고 볶은 고기덮밥으로 / 열살 난 딸아이 돼지처럼 비육시켜놓은 / 선진조국의 영양가족이 먹느냐 / 버터네 치즈네 / 비프스테이크네 피자파이네 / 기름진 양식요리 가르치기에 분주한 / 오늘의 요리시간의 / 그 머언 이방인들이 먹느냐 (쓴 밥 한 그릇―농사일지 8/21쪽)

논을 고르는 일은 / 농삿일 중 가장 힘이 든다 / 흙탕물은 온몸에 튀어오르고 / 흙굴헝에 발은 빠지고 / 유월 땡볕에 범벅땀은 흘러도 / 가장 평평한 땅에 / 키 나란한 모를 심기 위하여 / 반듯이 논을 고르다보면 (논 고르기―농사일지 12/32쪽)

최루탄처럼 쏘아대는 / 우리 무지한 농약살포를 보아라 / 저 새하얀 분말의 확산 속에 / 조용히 눕고 싶다 / 어질어질 어질머리 눕히고 싶다 / 울렁울렁 울렁가슴 눕히고 싶다 (농약을 뿌린다―농사일지 17/46쪽)


《새벽 들》(고재종, 창작과비평사, 1989)

우리 낫질은 노엽다
→ 우리 낫질은 끓는다
→ 우리 낫질은 불탄다
19쪽

돼지처럼 비육시켜놓은
→ 돼지처럼 살찌운
21쪽

농삿일 중 가장 힘이 든다
→ 가장 힘드는 시골일이다
→ 가장 힘이 드는 흙일이다
32쪽

흙탕물은 온몸에 튀어오르고
→ 흙물은 온몸에 튀어오르고
32쪽

우리 무지한 농약살포를 보아라
→ 우리 얼뜬 죽음물질을 보아라
46쪽

저 새하얀 분말의 확산 속에 조용히 눕고 싶다
→ 저 새하얗게 퍼지는 가루에 조용히 눕고 싶다
46쪽

조석으로 시원한 때를 골라
→ 아침저녁 시원한 때를 골라
50쪽

폭염일수록 미치게 더욱 푸르른 저 씩씩한 벼들
→ 더울수록 미치게 더욱 푸른 저 씩씩한 벼
→ 불볕일수록 미치게 더욱 푸른 저 씩씩한 벼
82쪽

주막집 깨워 해장술 한 병 홀라당 비우고
→ 술집 깨워 속풀이술 한 병 홀라당 비우고
99쪽

농사꾼은 죽을둥 살둥 일해도 퇴직금 한푼 못 받는 무지렁이여
→ 흙꾼은 죽을둥 살둥 일해도 마침돈 한푼 못 받는 무지렁이여
9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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