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하얀눈빛 (2022.12.15.)
― 순천 〈책방사진관〉
하루를 여는 일이란, 어제를 털고서 오늘을 새로 걸어가는 몸짓입니다. 어제까지 아쉽거나 못미덥거나 쓸쓸한 자취를 고이 내려놓고서 이제부터 새마음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잃은 열 가지가 있으면, 이 열 가지를 새로 추슬러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지을 수 있어요. 하루하루 익힌 숨결을 되새기면서 천천히 걷습니다.
구름빛을 살피고 햇살을 돌아봅니다. 바보하고 헤어지느냐 안 헤어지느냐를 따지면 스스로 바보라는 마음으로 갑니다.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느냐를 바라보면, 이 마음에 담는 숨결로 즐거울 길을 지어요. ‘짓는이’ 또는 ‘지음이’인 사람은 글만 짓거나 쓰지 않습니다. 하루를 짓고 삶을 짓고 꿈을 지어서 차근차근 생각을 지어가는 길에 오늘을 짓습니다. 이러다가 어느새 이야기를 짓고, 이 이야기는 고스란히 글·그림으로 피어납니다.
문득 순천으로 건너갑니다. 이모저모 저잣마실을 하고서 〈책방사진관〉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작은아이하고 바깥마실을 하며 여러 모습을 지켜봅니다. 우리 눈에는 둘레에서 흘러가는 모습을 담을 수 있고, 어느 곳을 가더라도 꿈씨앗을 심는 발걸음일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넘기다가, 글책을 훑다가, 적잖은 ‘어른 글꾼’은 아이들한테 ‘꿈씨·생각씨·사랑씨·숲씨’를 물려주려는 줄거리보다는 ‘부스러기(인문지식)’를 외우도록 부추기는 줄거리로 책을 여민다고 느낍니다. 이른바 ‘사회생활’을 하자면 ‘인문지식’을 갖추어야겠으나, ‘삶’을 누리고 ‘살림’을 가꾸는 길에는 ‘인문지식’이 아닌 ‘마음씨’를 품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도덕·예의·규칙’으로는 아름나라로 나아가지 않아요. ‘사랑으로 품는 마음씨’일 적에 아름누리로 걸어갑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보고 느끼는 대로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삐뚤빼뚤 쓰지 않고, 늘 아이답게 쓰고 그립니다. 우리는 아이들 손길에서 어떤 마음을 느끼거나 읽을까요? 잘하기(전문가)로 나아가야 할 아이가 아니라면, 아이 발걸음과 손놀림을 수수하게 맞아들여서 삶이야기·살림이야기·사랑이야기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십이월이란, 한 해가 저무는 끝이라기보다 새해를 여는 첫발이라고 느낍니다. 꼬마도 꽃도 끝에 서기에 새길로 갑니다. 섣달은 ‘서면서(멈춰서면서), 서는(일어서는)’ 걸음마입니다. 하얀눈빛이란 눈송이로 차곡차곡 그리는 들빛이면서, 나무마다 찬찬히 웅크리는 잎눈이요 꽃눈입니다. 서로 바라보는 따사로운 눈망울 빛결도 언제나 하얀눈빛일 테고요.
ㅅㄴㄹ
《나쁜 말 사전》(박효미 글·김재희 그림, 사계절, 2022.2.25.첫/2022.6.30.3벌)
《화 괴물이 나타났어!》(미레이유 달랑세/파비앙 옮김, 북뱅크, 2022.8.5.)
《길동무 꼭두》(김하루 글·김동성 그림, 북뱅크, 2022.11.30.)
《악당이 된 녀석들》(정설아 글·박지애 그림·사자양 밑틀, 다른매듭, 2022.1.27.)
《사람 살려, 감염병 꼼짝 마!》(지태선 글·그림, 사자양 밑틀, 다른매듭, 2021.11.8.)
《행복의 정원》(김소연 글·채복기 그림·사자양 밑틀, 다른매듭, 2021.11.30.)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숲하루 글, 스토리닷, 2022.12.13.)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