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3.4.26.

수다꽃, 내멋대로 38 담그림



  둘레에서는 ‘벽화(壁畵)’라는 말을 쓰지만, 나는 ‘담그림’이라는 말을 쓴다. 곰곰이 보면, ‘벽화’라는 이름을 내세워 돈벌이를 하거나 곁들임(재능기부·자원봉사)을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은 ‘낙후된 구도심이 밝아 보이도록 벽화 그리기 사업’을 벌인다고 밝힌다. ‘벽화’를 그리는 이들은 들꽃을 안 본다. 골목마을에 치덕치덕 붓질을 하되 골목꽃을 못 알아본다. 더구나 골목마을에서 아예 살지 않을 뿐더러, 골목집 이웃을 사귀지 않고 알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는 터라, 골목마을하고 한참 동떨어진 뜬금없거나 터무니없는 그림을 철벅철벅 발라 놓고는 함찍(단체사진)을 하고서 사라진다. 이 땅에 ‘뒤떨어진 마을(낙후된 구도심)’은 없다. ‘안 뒤떨어졌다고 여기는 잿집(아파트)’에서 먹고자는 이들 눈으로는 두겹(2층)짜리조차 드문 골목집이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담을 맞대는 살림집이 어떠한 숨결인지 겪은 적도 본 적도 알려고 나선 적도 없다고 할 만하다. 모름지기 골목집은 조용하다. 골목에는 쇳덩이(자동차)가 함부로 못 들어온다. 골목집에는 오름틀(승강기)을 놓을 일이 없다. 골목집은 씻는칸(욕실)이 조그맣게 한켠에 있을 뿐이라, 옆집에서 누가 씻건 말건 아뭇소리가 안 들린다. 이와 달리 잿집에서는 쇳덩이가 하룻내 들락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오름틀 소리가 끝없고, 위아래에서 물을 쓰거나 씻는 소리까지 퍼진다. 골목집에서는 틈새소리(층간소음)가 없다. 잿집에만 있다. 다만, 골목집이 모인 마을에도 ‘다른 소리’는 있다. 바람이 불 적에 골목꽃이 춤추는 소리, 골목나무가 한들거리는 소리, 골목꽃하고 골목나무를 보러 찾아온 크고작은 새가 들려주는 소리, 이따금 풀개구리까지 나타나 들려주는 소리, 풀꽃나무 곁에 깃드는 풀벌레가 들려주는 소리가 있다. 골목마을에서는 비가 오면 빗소리가 고르게 퍼져 노랫가락을 이룬다. 이제는 골목에서도 잿집 놀이터에서도 어린이가 뛰노는 모습을 보기 어렵지만, 지난날에는 골목 어디에서나 어린이가 우르르 뛰어다니면서 신나게 노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란히 있었다. 무엇을 가리켜 ‘낙후(뒤떨어졌다)’라 하는가? 손바닥만 한 땅뙈기를 몇 천만 원이라 이르는 돈으로 사고파는 잿더미여야 ‘번쩍거리’는가? 2023년 4월에 인천 배다리책골목 곳곳에 갑자기 나타난, 뜬금없고 어이없는 담그림을 보았다. 그러나 ‘담그림’이라 하기에 창피하다. ‘인천시에서 4000만 원이란 목돈을 들여 만든 벽화예술사업’이라는데, 인천 배다리하고 얽힌 박경리·현덕·주시경·김구·김소월도 아닌 움베르토 에코·모비딕은 뭐고, 인천막걸리도 아닌 스타벅스는 뭔가? 인천이나 배다리 골목집에 피어나는 들꽃이나 수수꽃다리도 아닌 큼지막한 꽃을 칙칙 뿌려대면서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이라 내붙이는구나. 마을에, 골목에, 책집에, 이웃이자 동무로 어우러지려는 마음도 눈빛도 없기에 ‘아트스테이’였네 싶다. 우리말을 모르거나 안 쓰기에 잘못이지는 않다. ‘빛(아트)으로 머문다(스테이)’고는 하되, 정작 무슨 ‘빛듦(빛이 깃듦)’인지 종잡을 수 없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담아 책으로 여민 이들은 하루아침에 글·그림을 쏟아내지 않는다. 기나긴 삶을 숨빛으로 녹여내어 글 한 줄에 그림 한 자락으로 편다. 골목마을에 ‘벽화사업’이 아닌 ‘담그림’을 여미려면, ‘4000만 원 경비지출’이 아닌, 마을사람한테 물어보고서 그림감을 고르고, 마을사람이 스스로 담그림을 빚으며, 배다리책골목 책지기가 사랑하는 ‘인천 글꾼·그림꾼’에 ‘인천 이야기책과 글꽃’을 놓아야 아름답고 사랑스레 오래오래 흘러가겠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말한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입다물거나 등돌린다. 돈을 노리는 사람이 돈에 군침을 흘린다. 사랑을 바라는 사람이 스스로 사랑을 짓는다. 이름을 거머쥐려는 사람이 이름팔이를 하려고 허수아비로 선다. 서로 이름을 부르며 동무로 어울리는 사람이 마을을 가꾼다. 들숲바다를 등진 사람이 막말과 막짓을 일삼는다. 들숲바다를 읽고 헤아리는 사람이 이웃을 포근히 품고 달랜다. 풀꽃나무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스스로 깎아내린다. 풀꽃나무하고 이야기하며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해맑게 피어난다. 밤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햇볕·햇빛·햇살을 싫어한다. 밤에 별바라기를 하는 사람이 햇볕·햇빛·햇살을 노래한다. 어른스럽지 않기에 아이 곁에 서지 않고, 아이가 못 알아들을 어려운 말을 일삼는다. 어른이 되려 하기에 아이 곁에 서면서, 아이랑 오순도순 즐겁게 우리말꽃을 상냥하게 편다. 볼썽사나운 담그림을 모두 지우기를 빈다. 그저 하얗게 발라 놓자. 마을은 마을사람 손으로 그려야 빛난다. 책이야기는 책집지기와 책꾼이 담아야 태어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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