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빛 / 숲노래 우리말 2023.4.4.
말 좀 생각합시다 75
이녁
전라도 시골에서 살며 새롭게 쓰는 말씨가 제법 있습니다. ‘이녁’은 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녁’이란 말씨는 마을 어르신을 비롯해서 이곳저곳에서 흔히 들었습니다. 다만, 젊은이나 푸름이나 어린이한테서는 이 말씨를 못 들어요. 이웃 고을·고장을 다니면서 귀를 기울이니 ‘이녁’은 경상도에 강원도에 충청도에서도 곧잘 쓰는 말씨인 줄 알아차립니다. 귀에 익은 말씨로 깃들면서, 또 이 말마디를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는가를 헤아리면서, 새삼스레 쓰고 즐겁게 폅니다.
국립국어원 낱말책을 살피면 ‘이녁’을 “ㄱ. 듣는 이를 조금 낮추어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하오할 자리에 쓴다 ㄴ. ‘이쪽’의 옛말”로 풀이합니다. ‘이녁’은 참말로 듣는 이를 살짝 낮추는 부름말일까요? 어쩌면 이 뜻풀이가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뜻풀이는 올바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숱한 낱말책은 아직 온나라 사람들 말씨·말결·말빛을 모조리 못 담아내기도 하지만, 우리말을 부러 낮추고 한자말을 부러 높이기 일쑤이거든요.
누구나 ‘이녁’을 갑자기 쓰기는 만만하지 않을 수 있으나, 말뜻을 곰곰이 짚도록 이야기하면서 새롭게 쓸 수 있어요. ‘이녁’은 ‘이 + 녁’입니다. ‘이녁’처럼 ‘저녁·그녁’ 또는 ‘이녘·저녘·그녘’을 쓸 수 있습니다. 사람을 가리킬 적에 ‘이꽃·저꽃·그꽃’이나 ‘이집·저집·그집’이라 해도 어울려요.
말씨란, 말을 하는 몸짓이나 느낌이나 빛깔이나 모습입니다. 어설픈 낱말책을 추스르고, 엉성한 낱말책을 다독이면서, 너랑 나 사이에, 그대랑 나 사이에, 너희와 우리 사이에, 알맞으면서 새롭게 펼 말씨를 오늘부터 지을 수 있어요.
‘너·그대·자네’하고는 다르면서 수수하게 쓰는 말씨인 ‘이녁’이라고 할 만해요. 듣는 쪽이나 가리키는 쪽을 낮추지도 올리지도 않으면서, 이곳에서 어깨동무하고 잇는 숨빛을 수수하게 ‘이녁’으로 그릴 만합니다. 그래서 “아무개 어르신 이녁이 들려준 이야기”라든지 “이녁이 나한테 준 나물”처럼 쓸 만해요. 서로서로 꾸밈없이 만나고 어울리는 자리에서도 알뜰살뜰 쓸 만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