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섣달빛 (2022.12.20.)

― 부산 〈파도책방〉



  인천에서 나고자라는 적잖은 사람들은 인천을 느긋이 바라볼 겨를이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요새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거친 인천 배움터(학교) 열두 해에 걸쳐 ‘인천사랑’을 들려주거나 밝힌 길잡이(교사)는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모두 스스로 “난 인생 낙오자라서, 여기 구닥다리 인천 막장 같은 데에서 교사를 한다구!” 하면서 우리를 두들겨패기 일쑤였습니다. 1982∼1993년 사이에 온몸으로 겪은 일입니다.


  서울살이(in Seoul)를 하려다 쓴맛을 보거나 나뒹군 분들이 인천 기스락으로 들어와서 ‘문화·예술·학술 우두머리’를 꽤 합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서는 길잡이(교수) 자리를 못 얻고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서 길잡이 자리를 얻고서 우쭐거리는 분을 숱하게 보았어요. 이런 분들을 스칠 적마다 딱하더군요.


  그런데 부산 동무를 사귀고 부산 이웃을 하나둘 만난 지난 서른 몇 해 동안 부산사람도 인천사람 못잖게 ‘서울바라기’가 많고, ‘서울로 안 가고 부산에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온몸으로 겪는 가시밭길’이 숱한 줄 느꼈습니다.


  왜 나고자란 고장에서 고즈넉이 즐거이 일하고 살림하고 사랑하고 보금자리를 꾸리고 아이를 낳으며 새길을 꿈꾸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싯길을 걸어야 할까요? 왜 ‘서울뚫기(in Seoul)’를 못하는 사람한테 “넌 졌어(루저·패배자)” 같은 이름을 붉게 찍으려 들까요? 고을지기(지자체장)를 뽑을(선거) 수 있대서 ‘마을살림(지방자치)’이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태어나고 뛰놀고 자라는 터전에서 실컷 노래하고 꿈꾸고 사랑할 수 있을 적에 비로소 마을살림입니다.


  한 해가 저무는 섣달 끝자락에 부산마실을 합니다. 시골인 고흥 버스나루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시외버스를 탑니다. 얼추 대여섯 시간이 넘는 먼길에 글종이를 무릎에 얹고서 얘기꽃(동화)을 한 자락 씁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시외버스는 오히려 손으로 글을 쓰기에 즐겁습니다. 부산 사상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탑니다. 고무신차림인 숲노래 씨인데, 발을 밟거나 어깨를 밀치는 손님이 여럿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다음 천천히 거닐며 보수동 책골목에 닿고. 이윽고 〈파도책방〉 앞에 섭니다. 올해가 가기 앞서 〈파도책방〉으로 책마실을 올 수 있어 기쁜데, 〈파도책방〉 자리는 올해를 끝으로 옮긴다는군요. 부산시하고 중구청은 여기 책골목을 사랑할 마음이 하나도 없네요. 번들거리는 새집을 지어야 ‘책골목’이 되지 않습니다. 다 다른 책집이 언제나 다 다른 책빛으로 책시렁을 건사하고 책손을 맞이할 수 있을 적에 책골목입니다. ‘헌책’은 “새로 읽을 책”입니다.


ㅅㄴㄹ


《겨레의 슬기 속담 3000》(교학사 출판부 엮음, 교학사, 1988.9.25.)

《이화문고 38 倫理와 思考》(소흥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5.7.25.)

《영농기술 꿩·칠면조·오리》(편집부, 오성출판사, 1973.첫/1984.2.20.재판)

《영농기술 비닐채소재배》(이경희 엮음, 오성출판사, 1979.첫/1984.2.20.재판)

《李朝木工家具의 美》(배만실, 보성문화사, 1978.9.15.)

《욕망하는 천자문》(김근, 삼인, 2003.6.27.첫/2003.7.10.2벌)

《해직일기》(조영옥, 푸른나무, 1991.5.30.)

《숲 속의 가게》(하야시바라 다마에 글·하라다 다케히데 그림/김정화 옮김, 찰리북, 2013.2.8.)

《ちびギャラよんっ》(ボンボヤ-ジュ 글·그림, ゴマブックス, 2004.5.1.첫/2005.4.10.7벌)

《名探偵 コナン 特別編 15》(靑山剛昌·平良隆久·阿部ゆたか·丸傳次郞, 小學館, 2002.4.25.)

《계몽사문고 63 파랑새》(마아테를링크/김창활 옮김, 계몽사, 1980.첫/1988.5.28.중판)

《민주열사 이한열 추모집, 그대 가는가 어딜 가는가》(청담문학사, 1987.7.23.)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