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11.9.

수다꽃, 내멋대로 30 자가용



  아마 1990년이었지 싶은데, 그해에 우리 아버지는 빚을 내어 부릉이(자가용)를 장만했다. 해마다 설·한가위뿐 아니라 크고작은 비나리(제사)에 작은아버지는 번쩍거리는 부릉이를 몰고 와서 자랑했다. 어머니·언니·나는 작은아버지가 부릉이를 자랑하건 말건 대수롭지 않았으나, 아버지만큼은 늘 켕겼나 보다. 우리 아버지가 부릉이를 장만할 즈음, 우리가 살던 13평짜리 다섯겹(5층) 잿빛집(아파트)에 부릉이가 딱 둘이었다. 쉰 집이 한덩어리인데 제법 넓은 빈터에 부릉이가 둘. 이 부릉이가 없던 때에는 빈터가 온통 우리 아이들 차지였다면, 우리 아버지조차 빚을 내어 장만한 뒤로 하나둘 늘면서 어느새 어린이가 놀 자리를 몽땅 빼앗겼다. 열여덟 살이던 1993년 겨울, 이제 배움수렁(대학입시)을 끝낸 또래는 아침에 배움터에 나온 다음 ‘운전면허 시험공부’를 한다면서 빠져나갔다. 이때 나는 “아, 나는 면허도 안 따고 싶고, 부릉이는 더더욱 안 몰고 싶어.” 하고 생각했다. 1995년부터 자전거로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 노릇을 하면서 내 몸은 자전거하고 두 다리한테 맞춘다. 1995∼2004년에 서울에서 살며 날마다 책집마실을 했는데, “그 많은 책을 무겁게 이고 지고 들고 가나? 차가 있으면 수월할 텐데! 내가 몰던 차 줄까?” 하는 이웃이 제법 있었다. “아뇨. 부릉부릉 몰면 책을 못 읽어요. 길에서 손잡이만 붙들지요. 게다가 글을 못 쓰지요. 더구나 기름값 탓에 책값을 못 씁니다. 전 두 다리하고 자전거로 살아갈 생각입니다.” 2004년에 권정생 할배는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을 안 할 수 있다〉란 글을 내놓는다. 이 글 첫머리는 “승용차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달아나야 한다.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달아나 이전에 우리가 버려두고 떠나왔던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 가까운 데는 걸어다니고 먼 곳에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백만 원 들던 생활비는 50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다.”와 같다. 이 글을 읽고 한때 부릉이를 버린 분이 꽤 있다고 들었으나 거의 다 도로 부릉이를 장만했다지. 부릉이만 버린대서 끝이 아니다. 잿빛집을 버리고 서울을 버리고 ‘마침종이(졸업장)·솜씨종이(자격증)’를 버리고, 이름값(명예)을 버려야 한다. 나는 2010년에 〈자가용을 버려야 책을 읽는다〉란 이름으로 글을 썼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갈수록 책을 안 읽는다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넘치기에,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까닭은 바로 ‘부릉이(자가용)’를 붙잡을 뿐 아니라, 잿빛집을 붙잡고, 서울바라기를 하기 때문인걸. 시골로 삶터를 안 옮기고, 이름값을 안 내려놓으려 하니, 책을 못 읽는다. 모두 매한가지이다. “부릉이를 버려야 숲을 살린다”, “부릉이를 버려야 서울을 살린다”, “부릉이를 버려야 제주바다를 살린다”, “부릉이를 버려야 아이들이 산다”, “부릉이를 버려야 참 민주·평화·평등을 이룬다”처럼 말할 만하다. 부릉이를 몰면서 어깨동무(성평등·페미니즘)를 이룰 수 없다. 부릉이를 몰면서 아이사랑을 할 수 없다. 부릉이를 모는 주제에 어떻게 들숲바다를 푸르게 품는 길을 가거나 목소리를 내겠는가? 부릉이를 버려야 모든 싸움(전쟁)을 녹여버릴 수 있다. 부릉이를 버려야 사람답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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