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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달책(잡지)에 이제 글·빛꽃을 그만 실으려고 생각한다. 어떻게 마지막글을 남기고 떠날까 하고 사흘을 돌아보았다. 어느 대목이 못마땅하거나 아쉽거나 모자랐나 하고 밝힐까 하다가 그만둔다. 《전라도닷컴》을 떠나기로 할 적에도 뭔가 더 쓰려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글에 담은 줄거리를 알아챌 만하다면 진작부터 그곳 스스로 바로세우거나 바로잡았을 테지. 어린이 곁에 서지 않는 곳하고는 다 끊을 생각이다. ‘어른 아닌 늙은이’ 목소리만 듣는 곳에는 굳이 있지 않으려고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님이 선보인 영화 가운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있는데, 나는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곁에 있으려고 한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엮는 신문이나 잡지가 없다면 하는 수 없으니, 스스로 지으면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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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떠나면서 묻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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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도록 《퀘스천》에 여러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었습니다. 시골에서 짓는 나즈막한 목소리를 담으려고 하는 데(매체)가 없다시피 한데, 시골 이야기도 만화책 이야기도 헌책집 일꾼 이야기도, 그리고 모든 제도권교육과 사회를 등지면서 숲빛으로 하루를 짓는 아이들 이야기도 차곡차곡 담아 주어서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제가 스스로 맡아서 하는 ‘우리말꽃 쓰기(국어사전 집필)’에 온마음을 기울이고 시골에서 숲바람을 머금으며 더 조용히 살아갈 생각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그리는 만화를 곁에서 북돋우면서 함께 만화책을 즐기는 살림을 이어갈 테고요. ‘웹툰’이나 ‘그래픽노블’이 아닌 ‘그림꽃(만화)’을 찬찬히 챙겨서 읽지 않는다면, ‘어른이 아닌 늙은이’가 된다고 느낍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빚은 《블랙잭》이며 《불새》이며 《붓다》이며 《아톰》이며 《레오》를 안 읽은 사람들하고는 말을 섞기가 힘듭니다. 그대가 어른이라면 타카하시 신 님이 빚은 《좋은 사람》이나 《카나타 달리다》나 《머리 자르러 왔습니다》 같은 만화책이 이 푸른별에 씨앗으로 심은 사랑이라는 마음빛을 알아채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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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그리는 척’할 뿐이면서 ‘막장연속극 대본’을 쓰는 소설은 참말로 소설 노릇조차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린이가 읽을 수 없는 글은 소설도 문학도 아니요, 만화도 문화도 예술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마음이 없다면, 그대는 ‘어른’이 아닌 ‘늙은이’입니다. 저는 언제나 스스로 물어보고 걷습니다. 그대도 늘 스스로 물어보고 걸어가시기를 바라요. 부릉이는 이제 집어치우자고요.


권정생 할배도 말했지만, 부릉이(자가용)를 내다버리지 않는 곳에는 어깨동무(평화)가 없이 미움(전쟁)만 가득할 뿐입니다. 권정생 할배 글은 다들 읽으면서, 《녹색평론》 같은 달책은 읽으면서, 왜 부릉이를 아직도 붙잡거나 껴안나요? 거짓말이나 눈가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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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천》에 글하고 빛꽃(사진)을 실으며 고마웠습니다. 이제는 떠날 때인 듯싶습니다. 즐거이 하루를 지으시기를 바라요. 가을바람에 겨울냄새가 살짝 묻은 2022년 8월 15일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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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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