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꽃

나는 말꽃이다 72 칸종이



  예전에는 글책이건 낱말책이건 찍는틀(인쇄기)에 맞추었기에 칸종이(원고지)에 글을 적었습니다. 칸에 맞추어 글씨를 하나씩 틀에 새겼어요. 이제는 따로 찍는틀을 안 쓰기에 칸종이를 쓸 일이 없습니다. 굳이 칸을 맞추지 않아요. 온통 하얀 판을 알맞게 가누어서 글을 여밉니다. 아직 글살림집(문방구)에서 칸종이를 살 수 있습니다만, 머잖아 사라지겠지요. 글씨를 손으로 옮겨쓰는 분이 늘기는 하더라도 칸종이 쓰임새는 확 줄었습니다. 아니, 칸종이에 맞추어 적은 글로 책을 내기란 외려 더 어렵습니다. 칸종이는 지난날 책찍기(인쇄)를 할 적에 빈틈이 없도록 하려고 마련했으나, 요즈음 책찍기 얼개에서는 애먼 종이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래도 아직 한 가지 쓰임새는 있더군요. 칸종이에 글을 적으려면 빨리 못 씁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칸에 넣어야 해요. 칸종이에 적은 글을 읽는 사람도 빨리 못 읽습니다. 글씨를 하나하나 따박따박 짚으며 읽어야 하더군요. 빠르게 치닫는 오늘날 물결을 조금은 늦추려는 칸종이일 만합니다. 아니, 빨리 써서 빨리 읽어치우기보다는, 알맞게 써서 알맞게 읽고 나누며 돌아보는 마음을 알려주는 칸종이라고 해야 어울릴 테지요. 한 칸을 채우듯 하루를 느긋이 알맞게 헤아립니다.


ㅅㄴㄹ


(곳 : 마을책집, 전주 잘익은언어들 2021.9.20.)

(곁 : 책숲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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