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 - 이주일, 나의 이력서
이주일 지음 / 한국일보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소개하고 싶은 책은 <뭔가 말 되네요>이다. 하지만 이 책은 판이 끊어진 지 스무 해가 되었지 싶다. 이제는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책이지만, 이 책과 함께, 이주일 님 다른 책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도 함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절판되어 사라진 책 소개글"을 적어 본다.

 


 - 책이름 : 뭔가 말 되네요
 - 글쓴이 : 이주일
 - 사잇그림 : 박수동
 - 펴낸곳 : 전예원(1985.11.15)


 이주일 아저씨, “뭔가 말 되네요”
 - 새책방에서 사라진 책 : 이주일 님이 남긴 책 하나



 〈1〉 거침없음


.. 돈으로 표 좀 긁어 모으시겠다구요? 요새 말로 참 ‘착각은 유엔 헌장에도 나와 있는 자유’라더군요. 그건 착각이에요. 돈으로 표 못 삽니다! 지위, 명성, 인기 전술로 표 좀 따 보시겠다구요? 그걸로 표가 따지면 이주일이는 국회의원 열두 번하고도 거스름이 남겠네. 딴 방법 아무것도 없어요. 국민과 같이 뛰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먹고 같이 잘 사람이 아니면 표는 면회도 못합니다. 그게 뭐 극장표라야 암표라도 사지, 어림도 없다구요 ..  〈26쪽〉


 전두환 독재가 서슬퍼렇던 때(1984~1985), 이주일 님은 이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았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돈도 못 벌고 지위도 없고 위엄도 없지만 그래도 이 이주일이를 제치고 애들의 표를 모을 수 있는 비결이 과연 뭐냐, 이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항상 애들과 아픔을 같이하고 애들의 고민거리를 귀담아 들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아껴 주고 애비가 야단칠 때는 막아 주기도 하고 변명도 해 주고 항상 애들 곁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표를 따는 거 아니겠읍니까?(25쪽)” 하고도 말합니다.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투표를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 가운데 누가 인기가 있겠느냐고 아내가 자신있게 말했다지요. 아내가 툭하면 그런 말을 했답니다. 하지만 이주일 님은 한 번도 집안투표를 하지 못했대요. 자기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아이들을 달래고 어르고 가르치고 키우고 사랑하고 아끼기는 아내가 훨씬 잘하는데, 어떻게 아이들한테 자기(아버지)를 찍으라고 하겠느냐 하면서요.

 한국사람이 길거리에 한국말 간판을 안 다는 모습을 보고는, “그 수많은 자장면집 중에 '뉴욕 자장면'이란 간판을 보셨읍니까, ‘아리랑 자장면집’을 보셨읍니까? 어느 중국집이든 그 간판은 완전히 중국식이에요.(43쪽)” 하고 말하는 이주일 님입니다.


.. 저도 LA에 가 봐서 압니다만 그건 사실이더군요. 바로 그 점입니다. 밖에 나가면 잘하실 수 있는 일을 안에서는 왜 못하느냐 이겁니다. 밖에 나가시면 우리 말 우리 글을 잘 쓰시면서 안에서는 왜 남의 것만 쓰느지 난 그게 이해가 안 돼요 ..  〈44쪽〉


 1980년대 첫머리에 쓴 글입니다. 2007년인 오늘 와서 다시 읽어도 가슴 뜨끔하면서 등골이 오싹할 만큼 날카롭군요. 아주 맞는 말이거든요. 아주 올바른 말이고요. 아주 맞는 말, 아주 올바른 말은 세월이 얼마가 흐르건 빛을 내고 힘을 냅니다. 하나도 맞지 않거나 조금도 올바르지 않은 말은 몇 해, 아니 몇 시간, 아니 몇 분 앞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쓰레기만도 못하고요. 금세 잊혀지거나 사라집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람한테 장사를 하는 술집이고 찻집이고 옷집이고 밥집인데, 날이 갈수록 한국말 아닌 나라밖 말을 아주 쉽게 쓰고 있네요. 서울 노원구청은 아예 공문서를 만들어 동네 가게들한테 ‘간판을 영어 공용으로 바꾸라’고 지시까지 하는 판이에요.


 〈2〉 눈치 안 봄


.. 야구선수는 만사 제쳐놓고 야구를 잘해야 하고 그게 근본이에요. 그 다음에 자기가 당구를 치든 야구방망이로 타작을 하든 해야 이해가 되는 거 아닙니까? 어떤 여성이건 가정을 갖고 자식을 가졌으면 그것을 간수하는 게 첫 번째의 임무요, 그게 그분의 생활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호호호…… 내가 좀 바쁘잖아요? 그래서 엄마로선 빵점이에요. 호호호” 이 소리가 어디서 나옵니까? ..  <58쪽>


 사회생활 바쁘다고 여성이 어머니 노릇을 빵점으로 한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면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서, 사회생활 바쁘다고 남자가 아버지 노릇을 빵점으로 한다면?

 사회생활은 남자만 하는 일이 아니요, 여자들은 해서 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낳지, 여자만 낳고 남자는 구경만 하지 않습니다. 낳은 아이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함께 키워야지 어느 한쪽에서만 키워야 하지 않아요. 다만, 이주일 님이 이 글을 쓴 때는 우리 사회가 남성 가부장 권위가 큰 때였습니다.

 세월이 묻은 이주일 님 책이라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지만,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받아들이면서, 반갑고 즐거운 모습을 반갑고 즐겁게 받아들이면 좋다고 느껴요. 글발 날리던 이주일 님이 아니고, 우리들한테 웃음 한 자락 선사하려면 이주일 님입니다. 예전 책이요, 묻힌 책이요, 잊혀진 책이지만, 이런 책 하나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으면서, 제 자신이 미처 모르고 지나치고 있을 ‘마음속 벽이나 굳은 껍데기’를 느끼며 하나둘 벗겨내 보기도 합니다. 지난날 이주일 님한테 깃들었던 아쉬움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추슬러 풀어내면 좋을까’ 생각하며 되짚고, 예나 이제나 훌륭하다고 보이는 대목은 ‘나도 이렇게 한결같음을 이어갈 수 있도록 더 애써야지’ 다짐하며 되새깁니다.


.. 만약 그렇다면 말입니다! 책 많이 읽는 사람은 수백 수천 권도 더 읽는데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 다 외우자면, 아이구! 수만 명 이름을 다 외워야겠네. 차라리 서울 시민 이름을 외우면 인사할 때 써먹기나 하지! 소설 주인공 다 외워서 어디다 써 먹을려고 그래? 더 웃기는 건…… 무슨 퀴즈 프로그램에도 그런 문제가 나와요. “노틀담의 곱추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이 뭡니까?” 이러면 삑- 부자가 울리고 스톱을 걸고…… 뭐라고 뭐라고 대답하고 점수 올라가고, 나 참! 웃기지도 않아 ..  〈88쪽〉


 어쩌면 독이 담긴 말이라 할 테지만, “어느 책에 어떤 구절 있는 거 그거 외우려고 책 읽었나? 그리고 그거 알면 유식한 건가요? 그럴려고 책 읽을 바에는 난 그 지겨운 고생해 가면서 책 안 읽겠네!(88∼89쪽)” 하고 덧붙입니다. 비아냥이라고 해도 될까요? 뭐, 비아냥이면 어떻고 독 담긴 말이면 어떻고 가벼운 비판이면 어떻습니까. 틀림이 없는 말을 꾸미거나 숨기거나 가리지 않고 말하는걸요. 남들 눈치를 보아가며 설렁설렁 말하지 않는걸요. 겉치레가 아닌 속치레를, 겉멋이 아닌 속멋을 찾아가자는 이야기를 하는걸요. 참은 참이라 말하고 거짓은 거짓이라 말하는걸요.

 좋은 모습은 북돋우고 얄궂은 모습은 고개숙여 가다듬습니다. 시샘을 하며 헐뜯지 않으며, 말꼬리를 잡으며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 누구나 살아가면 좋을 모습, 반가운 모습이지 싶어요.


 〈3〉 아뇨!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헌책방 책시렁에서 문득 찾아내어 재미있게 읽은 《뭔가 말 되네요》입니다. 이 책이 먼 뒷날 다시 태어날 날이 있을까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글쎄, 어쩌면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어쩌면 이대로 묻힌 채 ‘흘러간 옛책’으로만 남겠지요. 책에 담긴 속살을 캐내거나 잡아채려는 사람이 하나둘 나올 수 있는 한편, ‘이주일 같은 사람이 남긴 말이 뭐 볼 게 있겠어?’ 하며 코웃음을 칠 사람도 나올 테며, ‘이주일이 뭐 하는 사람인데?’ 하며 아예 잊어버릴 날도 다가오리라 봅니다.


.. 이렇게 중년 신사, 노신사란 말은 있지만, ‘중년 숙녀’라는 말 들어 보셨어요? 못 들어 보셨지? 그럼 여자는 중년이 되면 숙녀가 아니라 이겁니까? 나아가서, ‘노숙녀’라는 말은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어! 중년 신사, 노신사는 있는데 어째서 중년 숙녀, 노숙녀는 없느냐…… 이거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닙니까? 아, 여러분같이 말 잘하시는 분들이 어째서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갑니까? 정말 유감이에요! 여자의 명예를 찾아야 할 거 아니에요? ..  〈159쪽〉


 어떻든 좋습니다. 나중에 이 책을 알아보며 저처럼 가슴벅참을 느끼고, 두 번 세 번, 또는 네 번이나 다섯 번까지 찬찬히 다시 읽고 또 읽으며 눈물 한 방울 똑 흘릴 사람이 있어도 좋고, 이주일 님 이름 석 자를 아예 잊어버리는 세상이 되어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 되든 우리 몫이며 우리 삶이니까요. 우리 길이요 우리 넋이니까요. 자그마한 것이라 해도 좋은 것 하나를 느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라면 《뭔가 말 되네요》는 참말 뭔가 말이 되는 이야기책이 될 테지요. 큰 것에만 값어치를 두지만 그 큰 것끼리도 치고박고 싸우고 물어뜯는 세상이라면 《뭔가 말 되네요》는 헌책방에서조차 찾는 사람이 없어 먼지만 먹다가 폐휴지로 버려지는 종이뭉치가 될 테지요.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
(이주일) 오늘이 제 사형날인가요?
(------) 그런가 봐.
(이주일) 할 말 없어요.
(------) 그럼, 마지막으로 담배나 한 대 피워, 자.
(이주일) 아뇨!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우스갯소리는 모두 우리 삶에서 나옵니다. (4337.4.25.처음 씀/4340.6.16.고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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