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빛


숲에서 짓는 글살림

52. 도꼬마리



  가을이 저물고 겨울로 접어들다가 슬슬 잎샘바람이 부는 어느 날 ‘도꼬마리’가 불쑥 떠오릅니다. 아, 아, 도꼬마리. 요새는 이 들꽃을 아예 못 보다시피 합니다. 제가 어린 나날을 보내던 1980년대에는 큰고장 한켠에 빈터나 골목이 어김없이 있었어요. 배움터 꽃밭에 살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들꽃이 많았어요. 새마을바람이 한창이던 때에도 나라 곳곳 어디에나 빈터나 풀밭은 꼭 있었는데요, 씽씽이(자동차)가 부쩍 늘어난 1990년대를 지나니 바야흐로 빈터도 풀밭도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이러면서 그토록 흔하던 들풀이며 들꽃이 자취를 감추어요.


  아니, 쫓겨납니다. 아니, 짓밟힙니다. 아니, 잿빛덩이(시멘트)에 옴팡 파묻힙니다.


  2021년 새해에 열네 살이 된 큰아이 곁에서 ‘도꼬마리’가 그립다고 노래를 하니 “도꼬…… 뭐요? 그게 뭐예요?” 하고 묻습니다. “응? 그렇지? 넌 아직 도꼬마리를 못 봤구나. 우리 집에는 아주까리는 많아도 도꼬마리는 없어!” “도꼬마리? 도꼬마리도 풀이에요?” “그럼, 얼마나 멋지고 재미난 풀인데. 그냥 풀로 있을 적에는 잘 눈여겨보지 않지만,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그러니까 씨앗이 영글 적에는 동무들하고 도꼬마리씨를 찾으려고 뻔질나게 빈터랑 풀밭을 뒤졌어.” “왜? 그걸로 뭐하는데?” “응. 도꼬마리씨를 서로 몸에다 던지며 놀았거든. 도꼬마리씨는 갈퀴가 안으로 굽어서 말야, 털옷이나 솜옷에 척 붙어서 안 떨어지거든.”


도꼬마리 ← 창이(蒼耳)

도꼬마리씨·도꼬마리 열매 ← 창이자(蒼耳子)


  큰아이 곁에서 작은아이도 도꼬마리가 궁금합니다. 새해에는 도꼬마리를 찾아내고 싶습니다. 도꼬마리씨를 몇 톨 얻어서 우리 집 뒤꼍이며 책숲에 살살 뿌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아이들 곁에서 어버이로 살지만, 저 스스로 이 아이들마냥 어린이로 지내던 지난날, 들꽃으로 어떻게 놀았는가를 몸소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들꽃놀이를 하면서 들꽃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도꼬마리는 도꼬마리일 뿐 ‘창이’가 아니거든요. 도꼬마리씨도 도꼬마리씨일 뿐 ‘창이자’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삽질바람에 같이 휘말리면서 빈터하고 풀밭을 씽씽이랑 찻길이랑 가게한테 모조리 내주면서 우리 들꽃이며 들풀뿐 아니라, 들꽃말하고 들풀말까지 잊거나 잃는구나 싶습니다. 들꽃하고 들풀을 잊거나 잃기 때문에 수수하면서 쉽고 상그레한 말을 어느새 잊거나 잃지 싶어요.


  싱그러운 들꽃을 보면서 싱글싱글 웃지요. 상그러운 들풀을 쓰다듬으면서 상글상글 노래합니다.


원추리 ← 황화채(黃花菜), 훤초(萱草), 망우초(忘憂草)


  원추리를 아무렇지 않게 훑어서 나물로 삼던 사람은 아스라이 먼 옛날 옛적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아저씨나 아줌마라는 이름인 분들이라면 원추리 나물쯤 가뜬히 누리고 나눈 살림이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원추리꽃빛’을 맑게 떠올릴 만하겠지요.


  꽃다지꽃빛하고 개나리꽃빛하고 원추리꽃빛이 다릅니다. 진달래꽃빛하고 모과꽃빛하고 배롱꽃빛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꽃빛은 서로 얽히고 어울려요. 우리는 먼먼 옛날부터 꽃을 바라보면서 빛깔을 익혔고, 꽃노래를 부르면서 말빛을 가락으로 영글어서 즐겼습니다.


  생각해 봐요. 원추리는 원추리일 뿐, ‘황화채’도 ‘황초’도 ‘망우초’도 아닙니다.


봉긋꽃 ← 튤립


  이 땅에 없던 꽃이 꽤 많이 들어왔고, 새로 들어오며, 앞으로도 들어오리라 생각해요. 이 땅에 없던 꽃이니까 영어나 일본 한자말이나 중국 한자말이나 여러 바깥말을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만, 이 땅에서 아끼고 싶은 꽃마음을 담아서 새롭게 이름을 지어도 즐겁습니다.


  이웃님이 문득 건네준 ‘튤립’ 여러 송이를 받고서 한참 생각에 잠겼어요. 이윽고 말꼬가 터졌습니다. “이 봉긋봉긋 꽃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가!” 가녀리다 싶은 꽃대(줄기)에 꽃송이가 소담스럽지요. 그래요, 그 어느 꽃보다 봉긋봉긋 올라오는 꽃송이가 아름차니, ‘봉긋꽃’이란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요?


사랑바람꽃·사랑물결꽃·사랑해꽃 ← 카네이션


  사랑해 마지 않는 마음을 새빨간, 아주 빨갛디빨간 꽃으로 나타낸다고 해요. 해마다 오월을 맞이하면 거리마다 이 붉은꽃으로 물결칩니다. 흔히 ‘카네이션’이라 합니다만, 이 꽃송이를 가슴에 달면서, 또 이 꽃송이를 건네면서, 서로서로 “사랑해!” 하고 노래합니다.


  그래요. 사랑한다고 노래하면서 주고받는 꽃, 사랑한다는 마음을 담아 가슴에 다는 꽃, 사랑하는 사이를 더욱 짙게 물들이는 꽃, 오월 한 달을 온통 붉게 물들여 서로서로 사랑으로 물결치는 꽃, 사랑이라는 바람을 훅 끼치면서 포근히 어루만지는 꽃, 이 꽃한테는 ‘사랑바람꽃’이나 ‘사랑해꽃’처럼 고스란하게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요?


해바라기 ← 규곽(葵藿), 향일화(向日花)


  튤립이며 카네이션한테 이름을 새로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느 이웃님이 시큰둥히 한소리를 합니다. “자네는 식물학자도 꽃 전문가도 아닐 텐데, 꽃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붙여서야 되나?” 시큰둥꾸러기 이웃님을 바라보면서 봉긋웃음을 짓습니다. “‘찔레’를 전라말로 ‘찔구’라 하는 줄 아시지요?” “그걸 모르면 전라사람인감?” “‘찔구’란 이름은 누가 함부로 지었나요?” “아니, 함부로 짓다니, 구수한 사투리 아녀?” “네, 구수한 사투리는 누가 짓나요? 식물학자나 꽃 전문가가 짓나요?” “아, 아니, 그렇지만서도, 이름을 새로 짓는데, 전문가 생각을 들어야 하지 않것나?” “사투리는 여느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어요. 그리고 어린이가 지어요. 사투리란, 그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림을 짓는 사람이 언제나 즐거이 노래하면서 지어요. ‘해바라기’가 이 나라에서 안 자라던 꽃인 줄 아시나요? 그런데 누가 ‘해바라기’라고 이름을 지었을까요? 아무도 모른답니다. 왜냐하면 여느 사람들이 이 꽃을 바라보면서 저절로 마음에서 샘솟은 이름이거든요. 우리가 곁에 두고 사랑하고 돌보려는 꽃이라면, 우리가 즐겁게 노래하면서 이름을 지으면 돼요. 구태여 학술이름에 안 매여도 되잖아요? 우리가 사랑할 이름을 붙여서 나누면 넉넉하지요.”


들풀·들꽃·풀·풀꽃 ← 무명초(無名草), 무명화(無名花), 잡꽃, 잡종, 잡초, 잡화(雜花), 방초(芳草), 야생초, 허브, 약초, 약풀, 초본(草本)


  ‘이름없는 풀꽃(무명초·무명화)’이란 없습니다. 이름을 지으려는 사랑을 마음에 일으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름모를 풀꽃’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이름을 붙이면 되는데, 식물학자나 전문가라는 손길을 기다리니, 우리는 스스로 생각날개를 잊고 말빛을 잃습니다.


  들꽃이요 풀꽃입니다. 들사람이며 들넋입니다. 들길이고 들살림이에요. 누가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사투리를 오늘도 새롭게 지으면 좋겠습니다. 머나먼 옛날 옛적에 쓰던 말에만 기대지 말고, 오늘 이곳에서 사랑으로 짓는 말을 마주하고 품으면 좋겠습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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