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 저들은 대체 왜 저러는가?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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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6.22.

책으로 삶읽기 691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진중권

 천년의상상

 2020.11.11.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진중권, 천년의상상, 2020)를 읽었다. 책은 도톰하지만 비슷비슷한 줄거리로 흐르기에 이내 다 읽는다. 간추리자면 “민주당은 내로남불 끝판짓을 일삼아 스스로 무너지고, 따갑게 나무라는 목소리가 아닌 님바라기(팬덤)에 사로잡힌 목소리에 스스로 갇혔다”이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쉽게 빗대어 말할 만하다. 어버이라면 모름지기 아이를 가없이 사랑한다. 그러나 아이가 남몰래 막짓이나 검은짓을 한다든지, 동무를 괴롭히거나 돈을 훔친다든지, 이웃을 괴롭히거나 풀꽃나무를 함부로 짓밟는다든지, 들고양이나 들개한테 돌을 던지거나 막말을 일삼는다면, 어버이로서 마땅히 아이를 따끔하게 나무라고 가르치겠지.


님을 바라는 마음은 안 나쁘다. 그런데 막짓과 검은짓과 잘못을 일삼는 님을 그저 따르고 높이기만 한다면 이 나라꼴이 어떻게 될까? 민주당이 저지른 잘못을 따지면 으레 “저짝(국민의 힘) 사람들 잘못은 왜 안 따져?” 하고 되묻더라. 아니, 저짝 잘못을 따지는 자리가 아닌 이짝(민주당) 잘못을 따지는 자리에서 웬 뜬금없는 소리일까? 더구나 민주당은 오늘 이곳에서 ‘권력자·지배자’요, 이 힘(권력)으로 잘못을 저질렀으니 검찰·언론·야당이 민주당을 얼마든지 나무라야 하고, 나무랄 만하며, 꼬치꼬치 파고들어서 값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이명박을 사슬에 가두었는가? 사람들이 왜 아직도 전두환을 손가락질하고, 노태우가 고개숙이고 뉘우치는 모습은 다르게 바라보는가? 문재인이나 문준용이라는 이름도 스스로 ‘권력자·지배자’이기 때문에 더 고개숙여야 하고, 더 심부름꾼 노릇을 해야 하며, 더 몸을 숙여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고 베푸는 몸짓이 되어야겠지.


우리나라는 힘·돈·이름이 있으면 싸움판(군대)에 들어가더라도 ‘땅개(육군 보병 소총수)’가 되지 않는다. 지난날에는 군대 취사병도 뒷힘이나 뒷돈으로 들어갔다. 요즈음 군대 취사병은 퍽 힘들다지만, 지난날 군대 취사병은 노닥거리면서 먹을거리(부식)를 많이 빼돌렸고, 훈련도 안 뛰고 점호도 안 했다.


글바치인 진중권은 이 나라 밑자락을 이루는 사람(서민·시민·국민·백성·민중·민초·대중)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이 사람은 워낙 글바치(지식인)이기에, 글바치로서 제몫을 하려고 이 나라 힘꾼(권력자)인 민주당을 따박따박 나무라는 말을 들려준다. 진중권이 펴는 말이 다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옳다. 다만, 진중권이 펴는 말에도 하나가 빠졌다. “자, 그러면 내로남불을 일삼은 민주당과 구닥다리인 국민의힘, 아직도 헤매는 정의당·녹색당은 둘째치고, 여느 사람들이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살림을 사랑스레 짓는 아름다운 길은 무엇입니까?” 하는 말과 생각과 물음이 없다.


요즈막에는 잘잘못을 나무라는(비판) 목소리가 갑작스레 사라지고 파묻혀 버렸는데, 이런 판에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는 진중권은 여러모로 글바치 노릇을 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글바치가 참말로 글바치가 되려면, 낮에는 땅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 몸짓으로 나아가야지 싶다. 글바치 진중권 씨한테 “전라도에서 세 해 살아 보기”를 여쭙고 싶다. 전라도 보성이나 고흥이나 해남이나 신안처럼, 외지거나 깊은 시골자락에서 세 해쯤 살아 보시면 좋겠다. 이러고서 경상도 시골, 이를테면 영양이나 예천이나 봉화 같은 고장에서 세 해를 살아 보시면 참 좋겠지.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불거지는 잘잘못을 파헤치거나 따지는 눈썰미를 이제는 ‘지자체 깊은 곳에 썩을 대로 썩다가 문드러져 구린내가 펄펄 나는 밑자락’으로 들어가서 살펴본다면, 이녁 글에 엄청난 날개 하나가 돋으리라 본다.


ㅅㄴㄹ


놀이하던 인간들이 언제부터인가 놀 줄을 모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노동요를 들을 수가 없다. (82쪽)


철학의 빈곤은 통치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대통령의 발언에는 정작 국민이 듣고자 했던 이야기가 쏙 빠져 있었다. ‘윤미향의 거취를 어찌할 것인가?’ 여당은 범법만 없으면 문제없다며 판단을 검찰에 맡겼다. (224쪽)


무능하나 순결했던 진보는 어느새 유능하나 부패한 보수로 변신했다. 이는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정상’이다. (256∼257쪽)


사실 민주화 세대는 그동안 꾸준히 보수화 해왔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급속히 체제에 포섭돼 아파트를 가진 중산층으로 변모한다. (271쪽)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지배층이 되었다. 그들이 조국 일가의 일을 제 문제로 느낀 것은, 같은 상류층으로서 계급적 이해를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 그들은 더 이상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그 현실을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등 사회 전반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중을 장악해 얼마 남지 않은 희미한 ‘비판’의 목소리마저 잠재우려 한다. (282쪽)


박원순을 위해 성추행 피해자의 지위는 ‘피해호소여성’으로 변경되었다. ‘피해호소여성’이라는 표현은 곧 “나는 너의 말을 믿지 않겠다”는 결연한 집단적 의지의 표명이다 … 그(박원순)가 애써 세워놓은 원칙을 그들(조국과 민주당)은 그(박원순)를 위해 무너뜨렸다. 그러써 그가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마저 지워졌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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