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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스나르의 구두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한뼘책방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156
《유르스나르의 구두》
스가 아쓰코
송태욱 옮김
한뼘책방
2020.12.10.
《유르스나르의 구두》(스가 아쓰코/송태욱 옮김, 한뼘책방, 2020)를 서울마실길에 장만했고, 서울에서 볼일을 보러 움직이는 동안 읽었습니다. 이 책을 펴낸 ‘한뼘책방’은 서울 가좌마을 한켠에 2016년부터 조그맣게 책집을 열었고, 2020년 12월 22일에 닫았습니다. 나라에서는 돌아다니지 말라 합니다만, 볼일을 봐야 하는 사람은 돌아다닐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입가리개를 하더라도 우리는 숨을 쉬어야 하지요. 아무리 하늘이며 들이며 바다가 망가져도 우리는 흙을 일구어 밥을 먹어야 하지요. 마냥 묶어둔대서 풀 길이란 없습니다. 전화로 시키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나름일꾼을 생각한다면, 또 우체국 일꾼을 헤아린다면, 또 숱한 우리 삶자락 뭇일꾼을 돌아본다면 ‘모두 집에만 머물며 꼼짝을 안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서울마실을 않고서 고흥이랑 서울 사이에서 글월만 주고받으며 일을 풀려 했으나 두 달 가까이 도무지 안 되더군요.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서울마실을 했지요. 서울길은 서울답게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무엇보다 버스랑 전철은 사람이 물결칩니다. 밥집이나 찻집에 못 앉게 한대서, 작은모임조차 못하게 막는대서, 도서관이며 학교이며 이런저런 곳을 닫는대서, 이 돌림앓이판이 걷힐 턱이 없지 싶어요.
서울사람은 어떻게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할까요? 먹을거리를 다루는 저잣거리는 어떡해야 할까요? 서울사람 누구나 손수 논밭을 일구고 과일밭을 돌본다면 걱정없겠지요. 그러나 서른이며 쉰 겹을 오르내리는 그 잿빛집(아파트)에서 어떻게 논밭이나 과일밭을 가꿀까요?
이웃나라 글님은 ‘유르스나르’란 사람이 걸어간 길을 톺아보면서 삶과 생각과 하루를 되새깁니다. ‘유르스나르’란 사람이 남긴 글을 읽으며 글님하고 오래도록 삶을 나눈 오랜 동무를 떠올립니다. 글님 동무는 ‘스스로 읽고픈 책’을 거리끼지 않고 읽었다지요.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며 어떤 이웃을 마주하고 어떤 글·책을 읽을 적에 스스로 아름답고 즐거우며 사랑스러울까요?
전남 고흥군은 온나라에서 가장 말썽이 많고 안 깨끗한 고장, 이른바 ‘공직자 부정부패가 으뜸인 곳’으로 꽤 오래 손꼽힙니다. 이곳만 그처럼 썩은 벼슬판으로 손꼽히지 않습니다. 서울하고 먼 참으로 많은 시골 벼슬아치가 뒷짓을 숱하게 일삼습니다. 이 뒷짓은 누가 어떻게 언제 다스릴 만할까요? 나라지기는 무엇부터 바라보면서 무엇을 먼저 제대로 해야 할까요?
《유르스나르의 구두》를 읽으며 ‘유르스나르’도 궁금하지만, 글님하고 오래 마음을 나눈 동무가 훨씬 궁금합니다. ‘어른이나 남들 눈치를 안 보고, 오직 스스로 나아갈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삶길’ 하나를 바라보며 걸어간 글님 동무가 바로 글님한테 ‘글씨앗’을 남겼을 테지요. 수수한 자리에서 수수한 삶이 흐르고, 언제나 이 수수한 삶이 가장 빛나는 글감이요 노래가 되지 싶습니다. 다시 촛불이 물결치는 때를 그리는 해밑입니다.
ㅅㄴㄹ
내가 플랑드르(플랜더스)라는 지방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마 많은 일본 어린이들이 그러듯이 나막신을 신은 소년 네로와 개와 할아버지의 이야기 《플랜더스의 개》를 읽었기 때문이다. 루벤스라는 화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 이야기에서였다. (38쪽)
요짱은 머릿속에 마법의 거미를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녀밖에 생각할 수 없는 디자인의 장갑을, 동그스름한 손끝에 털실을 걸고 재빨리 짜나갔다. (56쪽)
안개가 짙은 날,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신호등 때문에 쉬이 나아가지 못하는 자어리 열차처럼 불안하게 나아가는 것 외에 글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나이지만, 유르스나르의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왠지 깊은 위로를 받는다. (147쪽)
그때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누가 가장 시몽과 비슷했을까. 그런 생각이 글을 쓰는 손을 멈추게 한다. 자투리를 이어서 붙인 작은 깃발처럼 나는 친구들 중에서 시몽을 찾는다. (230쪽)
#ユルスナ-ルの靴 #須賀敦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