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숨쉴 틈 (2019.1.11.)

― 천안 〈허송세월〉


  참고서나 문제집이 아닌 책을 사러 처음 책집에 가던 때를 제대로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형 심부름으로 만화책을 사러 마을에 있는 작은 책집을 다녀온 때는 대여섯 살이었을 수 있어요. 일곱 살 무렵에 형 심부름으로 만화책을 사던 일은 또렷이 떠오릅니다. 그때 그 책집이며, 책집으로 가려고 디딤길을 올라 2층 안쪽에 있는 골마루까지 걷던 일도 생생해요.


  중학생 무렵부터 시집하고 《태백산맥》을 사려고, 또 이때 갓 우리말로 옮기던 만화책 《드래곤볼》을 사려고 마을책집을 드나들었습니다. 이즈음에는 형 심부름으로 《하이틴》 같은 잡지를 샀고, 저는 《르네상스》하고 《아이큐점프》 같은 만화잡지를 샀습니다. 결이 다른 만화잡지 둘을 나란히 보았는데, 결이 달라도 줄거리나 이야기가 아름다우면 어느 만화이든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헌책집에 깃든 책시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처음으로 깨달은 뒤부터 이레마다 이틀씩 보충수업·자울학습을 빼먹고 헌책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말 그대로 달려갔습니다. 저녁 다섯 시 넘어서 드디어 정규수업이 끝나면 이 핑계 저 토를 붙여서 뒷수업을 빼먹으려 했고, 핑계나 토가 안 먹히면 학원에 가는 동무들 물결에 슬며시 파묻혀서 얼른 달아났지요. 고등학교가 있던 인천 용현5동에서 인천 금창동 배다리 헌책집거리까지 한숨도 안 쉬고 달렸어요.


  두 가지가 아쉬웠어요. 첫째, 버스를 타고 가면 버스삯이 아쉽고, 걸어가든 버스를 타든 달릴 적보다 느리니(버스는 여기저기 돌아서 가느라), 책집에서 10분이라도 더 책을 읽고 싶어서 한숨을 안 쉬고 달렸습니다. 아낀 버스삯으로는 책값에 보태었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삯까지 탈탈 털어서 책 한 자락을 더 장만하려고 하다 보니, 인천 배다리에서 인천 연수동까지 두어 시간을 걸어서 돌아갔어요. 더구나 이렇게 걸어서 돌아가는 밤길에 거리등 불빛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모로는 책에 미친 사람이지만, 다르게 보면 날마다 매바심이 춤추는 입시지옥 수렁에서 빠져나와 숨쉴 구멍을 찾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어느 모로는 대학입시하고 얽힌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멀리한 길이지만, 다르게 보면 삶을 슬기로 일깨우는 책을 마주하면서, 어른다운 어른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찾으려던 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사전을 쓰는 길을 갑니다. 예전에는 신문을 돌리거나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조용히 사전을 썼다면, 이제는 시골자락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고요히 사전을 씁니다. 예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썼고, 이제는 시골 한가운데에서 써요. 마땅한 소리일 텐데, 어느 자리에서 쓰느냐에 따라, 올림말을 다루거나 바라보는 눈길이며 손길이 확 다릅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살며 말을 다룰 적에는 아무리 서울에서도 숲을 그리면서 다룬다 할는지라도 서울내음이 스며요. 시골 한가운데에서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면서 말을 다룰 적에는 언제나 이 삶결이 그대로 말결로 옮아갑니다. 천안에 들른 길에 〈허송세월〉을 찾아갑니다. 매바심 입시지옥이었어도 용케 책을 노래했으니 그리 덧없는 날은 아니었지 싶습니다. 즐겁게 살고 싶어요.


《you are what you read 2 늘》(2017)

《이러다 사람잡지 2》(2017)

《fingerpoint 2 needle》(CHD 메딕스, 2017)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68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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