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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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서 (장관 후보자 이인영 아들 군복무 문제) : 군대를 다녀왔기에 자랑이 되지 않는다. 다만, 군대를 다녀오면서 겪은 일을 낱낱이 되새기면서, 이 나라가 어떤 판으로 돌아가는가를 찬찬히 읽는다면, 군대살이도 우리한테 삶을 비추는 새로운 거울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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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장관 후보자인 이인영을 둘러싸고서 그이 아들 군복무 문제가 불거진다. 이이뿐 아니다. 민주당이건 통합당이건 숱한 국회의원·장관·공직자·재벌 우두머리·교수 아들을 둘러싸고서 ‘군면제’가 말썽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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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돈도 이름도 힘도 없는 여느 집안 여느 아들이 병무청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해보자. 내가 그런 여느 집안 여느 아들이었다. 여느 집안 여느 아들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갈 적에 뭘 챙겨야 하는지 모른다. 아니, 대학교를 다니면서 곁일(알바)을 뛰거나, 고등학교만 마친 채 공장일이나 회사일이나 가게일을 하느라 바쁜 나머지, 신체검사로 하루를 빠져야 할 적에 매우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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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가 안 좋다. 이비인후과에서 내 코를 수술하고자 했으나 ‘수술로 완치 불가능·수술 후에도 평생 병원살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숨을 쉬기조차 힘든 코’로 살았기에, 둘레에서는 군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는 나를 두고서 “넌 면제를 받겠구나” 하고 말했다. 아무튼 나는 1994년 5월 19일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수원으로 갔고, 군의관이 나 혼자만 30분 넘게 진땀을 빼면서 신체검사를 하다가 묻더라. “야, 너 진단서 가져왔니?” “진단서가 뭡니까?” “진단서가 뭔지도 몰라?” “처음 듣는데요.” “병원에 가서 받아오는 거 말야.” “병원에서 뭘 받습니까?” “병원에서 돈 주면 네 신체사항에서 부적격인 사항을 적어서 준단 말이야.” “그런 게 있습니까?” “하, 내가 오늘은 7급으로 빼서 다음에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도록 서류를 해놓을 테니까,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가지고 와.” “저, 하루도 일을 빼기가 어려워서 오늘도 어렵게 왔는데요.” “10만 원만 쓰면 된다고. 10만 원도 없어? 부모님한테 달라고 해.” “저기요, 10만 원이 작은 돈도 아니고, 군의관님이 보시기에 제가 면제대상이면 여기에서 면제를 주면 되지 않나요? 진단서가 없어도 면제대상으로 보이면 면제를 하면 되고, 아니면 현역으로 보내면 되지 않나요? 왜 진단서가 있어야 하지요?” “……. 네가 줄을 잘못 섰어. 네 앞하고 뒤에 있는 놈한테 면제를 줘야 해.” “네?” “쟤들은 처음부터 면제대상은 애들이고, 쟤들은 형식으로만 신검을 받으러 왔어.” “하아. 군의관님 양심대로 하세요. 저는 진단서를 뗄 돈도 없고 그럴 겨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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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으로 4급, 코로 3급 판정이 나왔다. 그런데 이때 내 눈은 왼눈 1.5에 오른눈 0.1이었다. 군의관은 억지로 내 눈(시력)을 왼눈 1.0으로, 오른눈 0.1로 짜맞추어서 현역으로 밀어넣었다. 그래도 그 군의관은 나한테 “1994년 돈으로 10만 원을 들여서 진단서를 떼면 군면제가 되는 길이 있다”고 알려주었으니, 아예 양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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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들어갔다. 군대에 들어가 보니, 나 못지않게 눈(시력)이 엉터리인 아이들이 많이 들어온다. “너 있잖아, 안경을 쓰고도 저 과녁 안 보이지?” “네, 그렇습니다!” “거참, 나도 너 같은 눈인데 현역으로 왔지만, 넌 또 왜 현역으로 왔니? 너, 진단서라고 아니?” “모릅니다. 진단서가 뭡니까?” “됐어,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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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들어온 적잖은 사람들이 허리가 안 좋다. 고작 스물 안팎인 나이에 왜 이리 허리가 안 좋을까 하고 이 아이들 예전 삶을 짚어 보니, 하나같이 고등학교만 마친 뒤에 갖은 힘든 일을 짊어졌을 뿐 아니라,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가난한 집안에서 기둥이 되어 온갖 일을 했더군. “야, 너 이런 엄청난 허리디스크를 안고 어떻게 군대에 왔니?” “모르겠습니다.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너, 진단서라고 병무청에 내 봤니?” “그게 뭡니까?” “몰라. 됐다. 넌 의가사제대 감인데, 나도 땅개인 몸이라 뭐 도와줄 수도 없네. 잊어버려. 끝까지 버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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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입대 신체검사를 볼 적에 ‘진단서’를 가져가는 이는 ‘군대에 안 가겠다’는 뜻을 감추어서 빗댄 셈이다. 그리고 진단서는 ‘돈·힘(정치권력)·줄(인맥)’로 뗀다. 통일부 장관 후보자 한 사람만 말썽거리라고 보지 않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병원비만으로도 벅찬데 얼어죽을 진단서를 무슨 돈으로 떼는가? 20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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