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잘 : 책을 잘 읽어야 하지는 않다. 글을 잘 써야 하지도 않다. 말을 잘 해야 하지도 않으며, 길을 잘 찾아야 하지도 않지. 돈을 잘 벌어야 하지 않으며, 자전거를 잘 타거나, 씽씽 잘 달려야 하지도 않아. 얼굴이며 몸매가 잘 빠지거나 생겨야 하지 않고, 키가 잘 자라야 하지 않네. 하루를 잘 보내야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든지, 사진을 잘 찍어야 하지도 않다. ‘잘’만 빼면 된다.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으면” 된다. 글을 쓰고 싶으니 “글을 쓰면” 된다. “말을 하”고 “길을 찾”고 “돈을 벌”고 “자전거를 타”면 된다. 이 얼굴하고 몸매를 입으면 될 노릇이며, 어느 키이든 우리 몸이다. 잘 그리려고 애쓴 그림을 보면 갑갑하다. 잘 찍으려고 힘쓴 사진을 보면 숨막힌다. 뭣 하러 잘 해내려 하는가? 노래하지 않으니 ‘잘’에 얽매인다. 춤추지 않으니 ‘잘’에 휘둘린다. 꿈꾸지 않으니 ‘잘’에 치인다. 사랑하지 않으니 ‘잘’에 사로잡힌다.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하지 않아.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어. 모든 곳에서 ‘잘’을 덜어 놓으면 ‘잘못’조차 따로 없는 줄, 우리는 저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부대끼고 아프고 멍울이 들다가도 활짝 피어나서 달콤히 열매를 맺는 푸나무처럼 푸르게 우거진 숲이라는 숨결인 줄 알아채겠지. 1992.5.24.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