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빌리다 : 우리는 늘 빌린다. 먼저 몸이라고 하는 옷을 빌려서 우리 숨결이 깃든다. 우리 몸은 온누리에 자라는 갖은 푸나무에 살점을 빌려서 밥을 얻는다. 늘 흐르는 바람하고 빗물하고 냇물하고 햇볕을 빌려서 기운을 얻는다. 누가 지었는지 알 길이 없는 말을 빌려서 생각을 나타내고 나눈다. 값을 치러서 장만하든 거저로 받든, 또는 책집이나 책숲으로 찾아가서 넘기든, 일찌감치 살림을 지어서 깨달은 이야기하고 슬기를 책 한 자락을 거쳐서 눈썰미를 빌린다. 온통 빌리는 투성이인 삶이다. 어쩌면 우리 삶이란, 빌리려고 하는 걸음걸이인 셈. 즐겁게 빌리기에 빌린 값이나 삯을 치른다. 기쁘게 빌리니까 고이 돌려주면서 열매나 보람을 얹는다. 새롭게 빌려서 쓰기에 찬찬히 다스려 뒷사람이 넉넉히 누리도록 모신다. 1994.2.1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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